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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4호> [독립운동사] 청산리 전투(회전)의 약사略史 (1920.10.21~26)
# [독립운동사] 청산리 전투(회전)의 약사略史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전투가 있었다. 청산리는 백두산 근처에 있는데 그곳 여러 군데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연대가 싸웠는데 일본이 독립군 소탕을 위해서 간도출병으로 인해 벌어진 전투이다. (군정서라는 이 생소한 말은 원래 군정부라는 말을 써오다가 상해임시정부에서 ‘부’라는 명칭을 써서 구분하고자 경찰서, 소방서 와 같은 ‘서’를 쓴 것이다)
*북로군정서
대종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무장단체로서 서일(총재), 김좌진(김좌진)이 주축이 되었다.
*서로군정서
남만주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세운 독립혁명 단체로서 이상룡이 주축이 되었다.
*대한독립군
홍범도가 사령관이 되어 의병출신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 부대다.
*대한광복단
경상북도 풍기에서 결성되어 ‘풍기광복단’으로도 불린다. 의병출신 독립운동가들과 계몽운동가, 영남지역의 유림 등 여러 계층이 참여하였다.
*국민회군
대한국민회의 소속으로 다른 독립군부대들과 같이 홍범도 휘하의 연합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의군부군
처음 이범윤을 총재로 추대한 '의군산포대'라고도 칭하던 의병군단으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여 군사행동을 취해왔다.
*한민회군
혼춘 지방에 본영을 둔 부대로서 역시 홍범도 휘하에서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의민단
천주교인 의병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단으로 홍범도 부대와 합류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다.
*신민단
기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군 부대로 홍범도의 연합부대에 참가하였다.
①백운평 전투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이 백운평에 들어섰다.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독립군은 일본군을 향해서 사격을 가했고 일본은 지원군을 통해서 응전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김좌진은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갑산촌으로 퇴각의 지시를 내렸다.
②완루구 전투
1920년 오후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 부대를 일본군이 포위해 들어왔다. 그러나 한밤 중 서로를 오인하고 있는 일본군 부대를 무찌르는데 성공했다.
③천수평 전투
10월 22일 새벽 갑산촌에 근처 천수동에 일본군 기병대가 숙영을 하고 있었다. 김좌진 부대는 주변 고지에 이동을 해서 기병대를 전멸시켰다. 같은 날 아침 기병연대가 천수평으로 들어왔는데 역시 매복작전으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일본군은 어랑촌으로 병력을 증파했다.
④어랑촌 협공 작전
10월 22일 오전 9시부터 일본군이 김좌진부대를 포위해 공격해왔다. 이 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가 천리봉 서북쪽으로 싸움에 가세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연대장을 포함해 300명 이상이 전사했다.
⑤만록구 전투
10월 23일 이범석 장군의 기지를 통해서 알게된 일본군의 동태파악을 정보로 해서 만록구 고지에서 백병전을 펼쳐서 일본군을 퇴각시켰다.
⑥고동하 전투
10월 25일 밤 고동하 계곡 인근의 독립군 야영지를 일본군이 공격하였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 일부는 산중에 매복중이었다. 독립군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고 안도현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렇듯 청산리 전투는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를 일컫는 것이다. 주변의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치밀한 작전, 민간 한인들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빛나는 전투의 성과다. 중공의 장완린은 “청산리전투의 승리로 중국인들이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청산리 전투의 결과로 일본군은 중국에 압력을 넣어 독립군을 토벌케 했다. 더 이상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했다. 아쉽게도 만주의 독립군 연대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