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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10호> 오늘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태어난 날!(음 5월 10일)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 기록된 연개소문
연개소문은 홍무 14년(26세 영양제, 단기 2936년, 603년) 5월 10일 태어났다. 그리고 아홉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 몸가짐이 웅장하고 훌륭하였고, 의기가 장하고 호탕했다. 늘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 무리 속에 섞여 있어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일이 혼란하게 얽혀 있어도 미세한 것까지 분별해 내었다.
하사받은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고, 상대방의 진심 어린 마음을 헤아려서 거두어 품어 주는 아량이 있었다. 또한 온 천하를 잘 계획하여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감복하여 딴 마음을 품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법을 운용할 때는 엄격하고 명백히 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다스렸다. 만약 법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비록 큰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놀라지 않고,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눌 때에도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항상 자기 겨레를 음해하는 자를 소인이라 여기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는 자를 영웅으로 여겼다. 기뻐할 때는 신분이 낮고 미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지만, 노하면 권세 있고 부귀한 자도 모두 두려워하니 진실로 일세를 풍미한 시원스러운 호걸이었다.
연개소문이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나서 종일 물에 잠겨 헤엄쳐도 더욱 기력이 솟고 피로한 줄 모른다" 하니, 무리가 모두 놀라서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해의 용신이 다시 화신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고성제(27세 영류제)를 내쫓고 무리와 함께 고장을 맞이하였다. 이분이 보장제(28세, 단기 2975, 642~단기 3001, 668)이시다.
연개소문이 드디어 뜻을 이루자,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하였다. 이로써 자신을 성취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게 되었다. 또한 세 마을에 전(佺)을 두고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연개소문은 국방에도 힘써 당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에 대비하였다. 먼저 백제 상좌평과 함께 양국이 병존할 수 있는 방안을 세웠다. 또 신라 사신 김춘추를 청하여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도의에 어긋나고 불순하여 짐승에 가깝소. 그대에게 청하노니, 모름지기 사사로운 원한(자신의 딸과 사위가 백제군에게 죽음을 당한 일)은 잊어버리고 이제부터 핏줄이 같은 우리 삼국 겨레가 힘을 모아 곧장 장안을 무찌른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승리한 후에는 우리 옛 영토에 연합 정권을 세워 함께 인의로 다스리고,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하여 그것을 영구히 지켜 나갈 계책으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소?"
이렇게 두 세번 권유하였으나, 김춘추가 끝내 듣지 않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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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연개소문이 추정국, 양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 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세민(당태종)과 더불어 약정하여,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강소성)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왕개보(왕안석)가 이렇게 말했다.
“연개소문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 하더니 과연 그렇다. 막리지(연개소문)가 살아 있을 때는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건재하였으나, 막리지가 세상을 뜨자 백제와 고구려가 함께 망하였으니, 막리지는 역시 걸출한 인물이로다.”
막리지가 임종에 남생, 남건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형제는 사랑하기를 물과 같이 하여라. 화살을 묶으면 강하고 나누면 꺽어지나니, 부디 이 유언을 잊지 말고 천하 이웃나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라.”
때는 개화 16년(28세 보장제, 단기 2990, 657) 10월 7일이었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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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 기록된 연개소문은 영류제를 죽이고 나라에 반역한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기록은 다르다. 영류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중국에 사대한 인물들을 처단한 것 뿐이다. 어느 기록이 맞을까? 여기에 대한 단서는 "조의선인"에 있다. 조의선인은 삼랑의 후예다. 삼랑이란 삼신을 수호하는 이들로 먼 옛날 거발환 환웅께서 환국에서 천산을 넘어와 배달국을 열 당시 함께 환국의 정신을 가지고 와서 삼신상제님을 받들고 보호하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영류제가 고구려의 왕이었지만, 노자를 받드는 등 주체의식을 버리려 한 왕을 삼랑의 후예였던 조의선인 연개소문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연개소문을 통하여 '삼랑'의 진정한 역할을 알 수 있다. '삼랑'은 단순히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것을 뛰어 넘어 이 아리랑 겨레의 얼과 정신, 즉 국통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인 것이다.
또한 연개소문이 죽은 해를 『삼국사기』 「열전」에는 당고종 건봉 원년 즉 666년에 죽었다고 하여, 『환단고기』와 9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왕안석의 말을 근거로 한다면 백제가 망하기(663년) 전에 연개소문은 사망한 것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환단고기』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 옛날 배달 때의 인문 교화가 근세에 와서 비록 널리 행해지지 못하고 있으나, 천부경과 삼일신고가 후세까지 전해져 온 나라의 남녀가 모두 은연 중에 믿고 받들며,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께서 주관하신다"하고, 열 살 안 된 어린아이의 신명의 안위와 슬기로움과 어리석음, 뛰어남과 용렬함을 모두 삼신께 맡겼다.
『환단고기』「태백일사」<신시본기>
위 내용처럼 우리 아리랑겨레는 삼신을 받들고 모신 민족이었다.
연개소문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무엇이 진정으로 나라를 살리는 일인가를 삼랑의 후예, 조의선인을 통해서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