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5 - 대한사랑 2025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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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의 죽음 이후, 박자혜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
                          다. 1942년 차남이 영양실조와 폐병으로 숨진 것으로 보아, 그 가난을 짐

                           작할 따름이다. 남편이 죽은 후 8년 뒤인 1944년 박자혜는 해방을 한해
                          앞두고 단칸 셋방에서 최후를 맞는다. 유해는 충청북도 청주시 단재 묘소

                          에 합장되었다. 1990년 대한민국은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요 행적】

                              ‣ 1895년 서울 수유리 출신(당시는 경기도 고양군)
                              ‣ 1890년대 수습 나인으로 입궁

                              ‣ 1910년 12월 30일 궁내부 소속 고용원 해직 시, 궁궐을 나와 명신여학교에
                                입학하여 근대 교육을 받음. 명신여학교 졸업 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거쳐 1916년~1919년 초까지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로 근무
                              ‣ 1919년 3·1 만세 혁명 당시 부상자를 치료. 조산원과 간호부로 근무하는
                                한국인 동료를 규합하여 「간우회」를 조직.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 연경대 의예과 입학
                              ‣ 1920년 단재 신채호(1880~1936)와 결혼, 신채호의 독립운동 지원.

                              ‣ 1924년 큰아들 수범을 데리고 귀국. 독립지사 간 연락, 정보, 편의 제공 등
                                활동을 계속함. 보천교 간부로 독립자금 전달 업무를 맡음.

                              ‣ 1926년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에서
                                길 안내를 맡음.

                              ‣ 1936년 남편 신채호 뤼순 감옥에서 순국
                              ‣ 1943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조산소를 개원
                              ‣ 1944년 가난과 지병으로 홀로 셋방에서 49세에 사망함.

                              ‣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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