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4 - 대한사랑 2025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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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네거리에서 참외를 팔며 연명하
였다. 박자혜는 독립운동가 신채호
의 아내이자 과거에 한국 간호사들
의 만세 시위 및 동맹파업을 주동했
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가 심했다. 장남 수범이 학교에 가려
고 집을 나설 때마다 일본 경찰이 책
가방을 뒤져 검색했다. 이러한 간섭
때문에, 수범은 선린 상업학교를 중
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녀는 일
제 경찰에게 갖은 모욕과 폭력을 당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
서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 있는 신
채호에게 편지를 보내 서로의 안부
를 확인하기도 했고, 필요한 서책을
넣어 주었다. 단재의 역작들이 나온
배경에는 이런 박자혜의 헌신이 있
고국으로 돌아온 신채호 선생의 유골함을 안고 있는
박자혜 여사. ©동아일보1936.2.25 었다.
박자혜는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자식들을 정성껏 돌봤고, 신채호의 10년 옥살이를 수발하며, 남편이 석방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1936년 2월 관동교도소(뤼순 감옥)에서 ‘신채호 뇌
일혈로 의식불명, 생명 위독’이라는 전보가 날아왔다. 박자혜는 수범과 함
께 여순으로 급히 와서 신채호를 만났지만, 남편은 전혀 의식이 없었다.
결국 신채호는 1936년 2월 21일 오후 4시에 사망했고, 박자혜는 2월 24
일 특급열차 노조미 편으로 유해를 싣고 귀국했다. 이후 그녀는 집에 방문
한 <동아일보> 기자에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대련이 오죽이나 추웠겠습니까?
서울이 이러한데요. 이제는 모든 희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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