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2 - 대한사랑 202501월
P. 52

감당할 수 없어서 국내로 돌려보냈다. 임신한 아들은 유산되었거나 태어
             난 지 며칠 안 되어 사망해서 이름이 따로 붙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7년 3남 두범을 출산했다.


             세 번째 변곡점, 보천교 간부로서 독립 활동과 생활고

               서울로 돌아온 박자혜는 친척 집과 지인의 집을 전전하며 돌아다녔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후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
             로 파견되었을 때 박자혜는 보천교(普天敎) 북(北)방주인 한규숙을 중개하여
             주었다. 박자혜는 보천교의 부인 선포사였다. 선포사는 보천교의 지방 조

             직인 정교부에 소속된 간부를 말한다.
               매우 비밀스럽게 전개된 독립자금 전달 과정에서 역할을 했던 것이라면,

             박자혜 역시 보천교 신도나 간부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학교에 다닐 때 축구부 주장을 할 정도로 대장부 기질이 있던 박자혜는 홀

             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단재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보천교를
             만나지 않았나 싶다.

               일제 강점기 대한 독립운동의 실질적인 중핵은 보천교였다. 보천교는
             상해임시정부 설립 자금 5만 원(현재 추산가 10억 원)을 지원했다. 당시 2천만
             조선인 중 600만이 보천교 신앙을 했으니, 가히 국교(國敎)라 할 수 있을 것







                                                       청주 단재사당에 있는 박자혜와 신채호 동상























          50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