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대한사랑 2025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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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때 보천교는 일제에 문제종교니,
유사종교로 찍혀 감시받은 이유도 독립
자금을 전달하려다 발각되어서였다. 보
천교의 조직체계는 교주 차경석이 있고
그 아래 각지에 60인의 고문이 있었으며,
고문 아래에 6인조-12인조-8인조-15
인조 등의 조직을 갖췄는데, 각각 30원-
15원-10원-5원을 내어 일부는 제사 비
용으로 쓰고 잔금은 전북 정읍에 있는 본
부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곳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였
고, 이런 사실들이 최근 연구 결과에서 밝
(위)신채호 부인 방문기 ©동아일보 1928.12.1
혀지고 있다. (아래)남인사마당에 설치된 박자혜 산파터 표석
1926년 겨울에는 의열단원 나석주가
박자혜를 찾아왔다. 그는 조선식산은행
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할 계획을 털어
놓았다. 황해도 출신인 나 의사는 서울
지리가 어두웠기 때문에 박자혜는 건물
의 위치와 동선을 안내해 주었다. 당시
단재는 김원봉의 의열단과 함께 활동했
었기 때문에 단재는 부인인 박자혜에게
안내의 역할을 부탁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투척한 폭탄은 불발됐고, 나
의사는 일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결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
패하고 고문을 받던 중 ‘내가 나석주이다’라고 신출귀몰했던 자신의 신원
을 밝히고 죽음을 맞이했다.
네 번째 변곡점, 단재의 죽음
1927년 박자혜는 종로구 인사동 69번지에 ‘산파 박자혜’라는 조산원을
차렸다. 하지만 산파업이 생각대로 잘되지 않아서, 아들 수범과 함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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