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1 - 대한사랑 2025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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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6일 그는 동료 간호사들에게 만세운동과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뜻을 같이한 4명의 간호부와 함께 유인물을 만들고 3월 10일

                          만세 시위를 하기로 한다. 바로 간우회(看友會)라는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
                          어진 것이다. 의사들도 합세하여, 총독부 의원의 의사와 간호사의 태업이

                          시작됐다. 이것이 ‘간우회 사건’이다. 주동자로 24세인 그가 체포되어 갇
                          혔는데, 일제는 그를 “과격한 말을 하고 다니는 사나운 여성”이라고 기록

                          했다. 병원장의 보증으로 풀려난 그는 중국 망명을 결심하였다. 평범하게
                           살아가려는 그가 3.1 혁명을 맞아 각성하게 된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길
                           은 조국 해방뿐이라는 것을.



                           두 번째 변곡점, 단재 신채호의 부인이 되다

                            그는 바로 민족사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부인인 박자혜이다. 그

                           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연경대학 의예과에 들
                          어갔다. 이듬해 1920년 봄 우당 이회영의 부

                          인 이은숙은 한 남자를 소개해 준다. 바로 북
                          경에 와 있던 40세의 단재 신채호였다. 단재
                          에게는 이미 아내 풍양 조씨가 있었지만, 아

                           들 관일이 우유를 잘못 섭취해 사망하자 조
                          씨와 심하게 다툰 후 그녀를 친정으로 보내

                          버리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박자혜는
                                                                       (위)박자혜 여사 초상(1895~1943)
                          15살 연상 신채호의 청혼에 응했고, 두 사람                    (아래)박자혜와 신채호의 결혼기념 사진
                                                                       ©2009년 독립기념관 공개
                           은 베이징의 금십방가(錦什坊街)의 한 여관방에
                          서 신혼생활을 했다. 이때 신채호는 아내에게
                          “나는 가정을 등진 남편이니 섭섭해하지 말

                          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던 박자

                          혜는 1921년 음력 1월 장남 수범(1921∼1991)
                           을 출산했다. 그리고 1922년 차남을 임신했

                           는데, 신채호는 아내와 자식들을 경제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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