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대한사랑 2025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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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세력-급진혁명파
성리학은 고려 말 개혁과 조선 개국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나 이
를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진사대부 사이에 견해 차이가 발생하였
다. 첫 번째는 정도전, 조준, 권근의 급진혁명파다. 수적 열세와 모계 혈통
의 신분적 약점으로 인해 신흥 무인 세력과 연합하여 새로운 세상을 꿈꾸
었다. 이들은 고려왕조 자체를 변혁하고자 했고, 국가사회주의 성격이 강
한 주례사상을 중시하여 사대부보다는 국가와 농민의 이해를 반영하는 개
혁을 추진하였다. 이런 조선 개국의 주도 세력들에 대해서 이익주 서울 시
립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5세기 세계 다른 지역의 역사와 비교해 볼 때, 지배층이 위민(爲民)이라는 분
명한 목표와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점, 또 그걸 실천할 수 있
는 여러 제도적인 장치를 잘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시에 조선 말고는 그런 것
들을 성취한 나라가 없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군사적으
로 강력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말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 15세기 세계에
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였다고 생각합니다.” (『역사 저널 그날 1』, 73쪽)
두문동 72현으로 대표되는 고려의 충신들
두 번째로는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의 온건파로 기득권과 신분, 수적인
면에서 모두 우위에 있었다. 성리학 원리를 중시하여 수신을 강조하며. 고
려왕조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추진했는데 이들은 포은 정몽주, 김약항처
럼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기도 하였고, 야은 길재와 이양소, 태종 이방원
의 스승이자 『삼성기(三聖紀)』의 저자 운곡 원천석(원동중), 서견, 배상지, 민
유, 김선치, 맹희도 그리고 목화씨를 가져온 문익점처럼 은둔 낙향을 택하
기도 했다. 이들은 낙향 후 후학등을 양성하여 훗날 조선 후기 지배 세력
이 되는 사림의 시조가 되었다. 또한 은거, 낙향, 유배 이후에 조선 조정에
진출한 이들도 있다. 특히 안성, 조견, 하자종, 이행, 김자수 등은 태종대
이후에까지 계속 활약하였는데 이들은 조선의 새로운 정치세력이 되었다.
특히 태종은 왕권 강화의 하나로 조선 개국공신을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두문동 72현의 일부 자손들이 태종에 의해 임용되었다. 심지어 태종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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