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 - 대한사랑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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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품에 안고 내렸다고 그래요. 코트 주머니에 권총을 넣고 일부러 아이를 안고 내린
                      거죠. 일본이 자기를 헤치지 못하도록 한 거죠.



                      최원호 : 헐버트 박사가 당시 일본의 요시찰(要視察: 예의 주시한 감찰이 필요) 인물이었다

                      고 생각되네요.
                      김동진 : 예. 지금이야 중요한 인물에게 사고가 벌어지면 외교문제가 벌어지지만 그

                      때는 지금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해서 미국 영사관으로 달려간 거죠. 그랬더니 그
                      래도 통감부에 가야 된다고 해서 갔다고 그래요. 갔더니 통감부에서 경호원 이름으
                      로 감시자를 붙였다고 합니다. 당시 두 달간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감시자를

                      따돌리고 한규설을 만난 거예요. 을사늑약을 끝까지 거부한 참정대신 한규설을 만
                      나서 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나중에 <뉴욕타임즈>에 실은 거예요. 당시 실은 내용을

                      보니까 3,600자더라고요. 1916년 신문인데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을 공격하는 내
                      용이에요. 당시 헐버트의 이런 역사 증언이 미국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이나 블
                      라디보스톡이나 상해에도 전달이 됐겠죠. 그러니까 헐버트의 독립운동사에서 역할

                      이라는 게 어느 한국인도 할 수 없는 일을 한 거예요.



                      최원호 : 헐버트 박사가 1907년에 대한제국에서 추방당한 이후에 어렵게 생활하셨
                      다고요?

                      김동진 : 예. 이분이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아무 직업이 없이 강의와 글 기고하는
                      걸로만 먹고 살면서 38년 동안 한국의 독립운동을 했어요. 그래서 당시 헐버트를

                      만난 윤치영 등의 증언을 보면 헐버트가 너무 남루하게 산다고 그랬어요. 일정한
                      직업이 없고 강의 등으로 사니까 그랬겠죠. 미국에 돌아가서 그렇게 살았다는 거예
                      요.



                      최원호 : 그런 분을 오랫동안 우리 정부에서 외면했다고요?

                      김동진 : 예. 원래 1950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태극장을 받았어요. 근데 박정희 정
                      권 들어서서 외국인이라서 3등급인 독립장으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3등급

                      으로만 돼 있죠. 옛날에 태극장을 줬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3등급으로 돼
                      있어서 대우를 못 받아요. 추모식 때 대통령 화환도 안 와요. 그래서 제가 보훈처

                      에 가서 1등급을 올려야 된다고 설명을 했는데, 공무원들이 이해를 못해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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