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6 - 대한사랑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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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호 : 예. 그렇군요.
김동진 : 그래서 제가 한글학교에 가면 주시경 말고 헐버트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주시경도 훌륭하지만 헐버트도 훌륭하다. 주시경이 헐버트의 제자고 <독립신문>에
서 일하게 된 것도 헐버트가 추천해서 일하게 된 거예요.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믿
지를 않아요. 그래서 내가 다 기록으로 제시를 해서 지금은 한글학교에서도 헐버트
박사를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학자들 중에는 한글 창제와 보급의 3대 위인으로 세
종대왕과 헐버트, 주시경 세 분을 주장하는 분도 있어요. 물론 아직도 그걸 거부하
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헐버트는 한글을 널리 알리고 체계화시킨 인물로 금
관문화훈장도 받았어요. 처음에는 공무원들이 콧방귀도 안 뀌었어요. 그런데 공무
원 과장 하나가 내가 낸 자료를 다 읽어본 거예요. 그런데 당시 제가 접수한 자료
를 학자들한테 보여줬더니 아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가
강하게 주장해서 통과를 시켰다는 거예요.
최원호 : 금관문화훈장은 언제 받으신 거죠?.
김동진 : 예. 박근혜 정부 당시거든요. 금관문화훈장은 국무회의를 통과해야 줄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헐버트 박사의 업적을 모르면 은관(銀冠)
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은관을 주면은 청와대 앞에서 자결할 거라
고 그랬어요. 진짜로 어떻게 헐버트한테 은관이 가냐. 그랬는데 국무회의에서 금관
문화훈장으로 통과가 됐어요.
최원호 :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측면에서는 어떤 부분들을 기억해야 할까요?
김동진 : 이분이 두 번 유서를 쓰신 분이에요. 그만큼 목숨을 걸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분입니다. 헐버트 박사가 헤이그 밀사 사건 때문에 1907년에 일본
으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해요. 그 이후 2년 뒤인 1909년에 잠시 조선에 방문한 적
이 있어요. 근데 그때 일본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미국 가족한테
유서를 남겼어요. 1909년에 조선에 들어올 때 이분이 혼자 유럽을 거쳐서 들어오
는데 독일 베를린에서 38리벌버 권총을 한 자루 사서 들어와요. 시베리아 횡단 열
차를 타고 중국 단동에 도착한 뒤에 잠시 머물 때 숙소 배게 밑에 권총을 놓고 잤
다고 그래요. 아무리 미국 영사의 보호하에 들어왔다고 해도 목숨의 위협을 느낀
거죠.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역에 내렸을 때 선교사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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