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0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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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흔치 않았다. 심산은 ‘칼을 든 선비’ 남명 조식의 선비 정신을 사숙(私淑)하였
고, 자신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 같은(持己秋霜 待人春風)
참 선비의 길을 걸었다.
3.1 혁명에 유림 대표가 없는 이유
1910년 경술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피탈되고, 일제의 강제 점령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 정치에 다 죽은 줄 알았던 대한 민족의 정신은 대한
제국 고종 광무제의 인산일(因山日)에 맞춰 거족적 항쟁을 펼쳤다. 자주독립을 선
언한 비폭력 투쟁을 벌였다. 이른바 3.1 혁명!
민족 대표 33인 명의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대표가
참여하여 범종교적인 일체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조선 500년을 지배한 유림의
대표가 빠져서 국민의 실망도 컸고, 가장 큰 교단과 교세를 자랑하던 유림에게
는 충격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충군 애족 사상을 내세운 유림의 열
패감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만해 한용운은 유림의 대표격인 거창의 면우(俛宇) 곽종석에게 연락하여
민족 대표 서명 문제를 논의했다. 병석에 있었던 곽종석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
고, 아들을 대신 서울로 보냈다. 그러나 이미 선언서가 인쇄에 들어간 상태였다.
당시 심산 김창숙도 모친의 매서운 질책으로 4~5년간 독서에 전념하다 「독립선
언서」 준비 소식을 듣고 상경했으나, 이미 인쇄가 들어가서 서명할 기회를 놓쳤
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림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여 오유(汚儒, 세상 물정에 어
두운 선비), 부유(腐儒, 정신이 아주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라는 손가락질과 치욕을 당하
게 된 것이다.
이에 유림 대표들은 「독립선언서」 서명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계기로 분발하
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심산 등은 의암 손병희를 비롯한 민
족 대표들이 구속되었기 때문에 불행 중 다행으로, 유교 대표들이 남아서 국제
활동의 사명을 맡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파리 강화회의에 「독
립청원서」를 제출하는 『파리 장서(長書)』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3.1 혁명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운동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국내외 각처
로 확산하고, 각계각층이 참여한 민족독립운동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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