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5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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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44세 파. 차남 김찬기는 17세부터 독립사상을 품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군사 선전위원장에 고 몇 차례 투옥되었고, 감시가 심했다. 망
추대됨. 명 도중 사망하여 해방 이후 유해가 돌아
옴. 김창숙은 두 아들을 독립전쟁에 바쳤
»1925년 47세
다.
중국 군벌 풍옥상(馮玉祥)과 교섭, 수원(綏遠)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얻어냄, 만주 독 »1946년 68세
립군 조직의 군사부 고문에 선임됨. 군자 신탁통치 반대 투쟁. 성균관 대학 설립, 초
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 버스 추락 사 대 학장으로 취임함.
고로 중상을 입음.
»1948년 70세
»1926년 48세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3월 부족한 모금액을 가지고 다시 중국으
»1950년 72세
로 탈출, 나석주(羅錫疇, 1892~1926)를 국내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인민군 측의 사상
에 밀파,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폭
전향 요구를 거부함.
파하게 함. 모금 운동 탄로, 유림 600여
명 붙잡힘(제2차 유림단 사건). 임시정부 의정 »1959년 78세
원 부의장에 선출(의장은 이동녕). 종합 대학 성균관 대학교 총장직 사임하
고 효창공원 내 일곱 열사 묘소 이장 반대
»1927년 49세
투쟁에 성공함. 이후 이승만 독재 정권에
장남 환기(煥基)씨가 국내에서 붙잡혀 고문
맞서 싸우고 이승만 대통령 사퇴를 권고
끝에 사망, 상해 공동 조계 병원에서 일경
함.
에게 붙잡혀 대구로 압송된 이후 극렬한
옥중 투쟁을 벌임. »1960년 82세
4·19 혁명 뒤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투
»1940년 62세
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함.
일제의 ‘창씨(創氏)’ 강요를 끝내 거부함. 모
친 별세 21년 만에 고향 집에 돌아와 묘막 »1962년 84세
(墓幕)에서 시묘함.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서거, 5월
18일 사회장으로 수유리 127-4 묘지에 안
»1943년 65세
장.
차남 찬기(燦基)를 중경(中慶) 임시정부로 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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