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6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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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이 나라시노 포로수용소로 향했다. 그런데 나라시노 수용소는 단순히 조선
            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었다. 유달리 눈에 띈 ‘불령(不逞)의 무리’를 선별

            수용하고 있었다. 수용 인원의 통계를 보면 최대였던 9월 14일의 3,200명에서 9
            월 15일부터 진행된 석방과 이송을 합한 최종 석방자와 잔류자의 합계가 2,925

            명으로 줄어들었다. 과연 275명의 조선인 수용자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학살의 생생한 증언자료『진재일기』

              관동대지진 55주년(1978년)을 맞아 치바현 조선인 희생자 추도조사위원회와 역
            사교육자협회의회, 자치체문제연구소가 지역사 발굴을 통한 ‘체험자 목격담’과

            ‘청취’ 작업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한 집안에서 소장되어 오던 자료가 햇빛을
            보게 되었다. 바로 『진재일기』다. 『진재일기』에는 1923년 9월 1일 대지진 발생

            을 시작으로 조선인 폭동에 대한 유언비어 유포를 통해 긴장감이 높아지는 과정
            과 자경단 성립, 그리고 활동에 대해 날짜별로 서술되어 있다. 『진재일기』를 통

            해 나라시노 수용소에서 사라진 275명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7일 : (생략) 오후 4시경 막사에서 조선인을 넘겨준다며 데리러 오라는 연락

                이 있었다. 주모자 인수 차 보내기로 했다. (중략) 밤중에 조선인 열다섯 명을
                받아 각 구에 배당했는데, 다카츠(高津)는 신키도(新木戶)와 공동으로 세 사람

                을 인수하여 절 마당에 두고 지키고 있다.


                8일 : (생략) 또 조선인을 받으러 가다. 9시 경에 두 사람을 받아 오다. 전부

                다섯 사람. 나기노하라 산의 묘지가 있는 곳에 구멍을 파고 앉혀서 머리를
                자르기로 결정. 첫 번째로 쿠니미츠(邦光)가 싹둑하고 멋지게 머리를 잘랐다.

                두 번째로 게이지(啓次)가 잘랐으나 이번에는 절반밖에 잘리지 않았다. 세 번
                째로 타카하루(高治), 머리의 피부가 조금 남았다. 네 번째로 미츠오(光雄)는
                쿠니미츠가 사용한 칼로 보기 좋게 [머리를] 데구르르 날렸다. 다섯 번째로 키

                치노스케(吉之助)는 힘이 부족하여 절반밖에 자르지 못했다. 양칼로 잘랐다.
                구멍 안에 넣고 묻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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