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2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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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국하였다.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 ‘제2차 유림단 사건’과 1925년 동
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와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에 폭탄을 던지고 일
인들을 사살한 나석주 의거 등은 모두 심산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그 후의 내부 파쟁에 대한 조정에 항
상 앞장서 노력하였고, 유학과 한문학의 교양을 바탕으로 손문(孫文)을 비롯한 중
국 국민당 인사들과 교제를 벌여, 그들에게 ‘한국 독립후원회’와 ‘중한호조회(中
韓互助會)’를 만들게 하였다.
⊙ 제4기 1927년~1945년
1927년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의 영국인 병원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본국으
로 압송된 이후 대구 경찰서에서 1년여의 고문을 겪고 14년 형을 선고받았다. 불
굴의 옥중 투쟁과 그에 대한 일제의 지독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고 몇 차
례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결국 형 집행 정지로 대구와 울산 백양사 등에서 요양
을 하다가 몇 해 후 불구의 몸으로 성주 옛집으로 돌아왔다. 심산의 별호는 벽옹
(躄翁)이다. 벽옹은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으로 고문에 의해 몸이 상해서 그런
것이다. 또한 심산은 일제의 강요에 따른 창씨개명, 즉 일본식 성명 강요에 적극
반대하고 민족주의적 절조를 한 치도 굽히지 않는 조선 선비의 결기를 보여주었
다.
⊙ 제5기 1945년~1962년
해방 전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던 심산은 일제 패망
직전 조직이 탄로되어, 일경에게 구금되어 서울로 호송되던 도중 왜관 경찰서에
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곧 상경하여 해방된 나라를 새로 만드는 일에 이바지하려
하였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 찬반, 미소 공동위원회 참가 여부 문제로 좌
익 정당과는 물론 한민당을 위시한 이승만, 김규식 등 우익 인사들과도 의견이
맞지 않아 항상 고립을 면할 수 없었다.
이에 심산은 정계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유림의 재조직과 그것을 발판으로
한 성균관과 성균관 대학의 설립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교육 시행에 힘을 썼
다. 그러나 민족 분열의 항구화를 걱정하며 백범 김구와 함께 남한 단독 선거를
반대하였고, 나아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독재화에 정면에서 투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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