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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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 김창숙 연보                                »1913년 35세
                                                   모친의 엄한 견책을 받고 비로소 독서에
         1879년 음력 7월 10일 경상북도 성주군
                                                   전념, 그 뒤 몇 년간 학문에 정진함.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사도실)에서 조선 선
         조 때의 명현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919년 41세

         13대 종손으로 부친 김호림(金護林), 모친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출생. 의성(義城) 김                  위해 영남과 충청도 유림 137인의 서명
         씨 가문이다. 의성 김씨 집안은 85명의 의                  으로 이루어진 『파리장서』를 휴대하고 3

         병 운동가, 독립지사, 의사, 열사를 배출한                  월 23일 중국으로 망명, 이때부터 망명지
         가문으로 유명하다.                                에서 독립투쟁을 전개, 국내에서는 이 사

                                                   건으로 500여 명이 붙잡힘(제1차 유림단 사
         »1898년 20세
                                                   건). 손문을 회견하고 중국 각계 요인들과
         이종기, 곽종석, 이승희, 장석영 등 대학
                                                   회담하여 한국독립후원회를 조직하게 함.
         자들의 문하를 두루 찾아 공부, 특히 이승
         희(李承熙)를 따랐다. 1905년에는 이승희와                 상해의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의정원
                                                   의원(경북 대표)에 선출됨.
         함께 을사오적의 처단을 상소함.

         »1910년 31세                                »1920년 42세

         전국 단연동맹 성주 대표로 활약함. 사립                    모친 별세. 상해에서 박은식과 중한 혁명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함. 8월 일제 강                  운동 잡지<사민일보(四民日報)> 발간, 북경

         점이 시작되고 대한제국이 망하자, 술과                     에서 단재 신채호와 독립운동 잡지<천고
          통곡으로 한동안 광인처럼 지냄.                        (天鼓)>를 발간함.




























                                                              파리장서 서명인 명단 ©심산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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