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5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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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9
그림1) ‘ヤヤ’는 살인, ‘ヤ’는 폭탄, ‘ ’는 방화, ‘ ’는 우물에 독약투여
(조선인이 이런 행동을 했다고 계엄사령부가 조작한 유인물)
円 55錢을 말해보라”, “기미가요(君が代)를 불러라”
라고 강제한 것과 “이놈은 넓적한 얼굴이다”, “납작
한 뒤통수다”, “홑눈꺼풀이다” 등 외견상의 차이로
조선인 식별 근거로 삼아 사형(私刑)을 집행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강덕상 著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위와 같은 조선인 식별법은 1913년 <내무성비(內
務省秘) 제1542호>로 경보국장이 하달한 통첩의 내용이다. 일반 민중이었던 자경
단원이 조선인에 대한 외견상의 식별법부터 부정확한 발음에 대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무성 통첩을 바탕으로 경찰이 자경단원들에게 전수, 교육시킨 것이
었다. 죽창과 일본도, 엽총과 곤봉을 든 자경단원의 광기 어린 조선인 학살의 배
후에는 혼연일체가 된 군대와 경찰, 즉 일본 정부가 그 배후에 있었던 것이다.
나라시노 조선인 수용소
나라시노 수용소 사건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의 또 다른 본질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치바현 나라시노에 조선인 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9월 4일 오후
10시에 제1사단 사령부가 계엄군의 실전부대였던 기병 제2여단에 명령을 하달
하면서였다. 그동안 나라시노 수용소는 ‘조선인 폭동’이 사실무근이란 것을 확인
한 일본 정부가 조선인을 자경단의 폭력으로부터 격리,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
다고 이해되었다. 9월 5일은 관동대지진 이후 혼란이 일단락되고 관·민이 사후
처리를 둘러싸고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9월 5일. 피로 물든 포대자루와 더러운 속옷 또는 바지 하나만을 걸친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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