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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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6.11.14
조만식은 보천교가 직면한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려면 정의부와 같은 독립운
동단체와 연결되어 활동할 필요가 있다고 설득하여 ‘보천교는 만주를 개척하는
사업비 30만 원을 제공해 재외 독립단체의 활동을 원조하며, 사업을 경영하면서
생긴 이익금은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하고, 모집된 군자금은 독립단체와 보천
교가 절반으로 나눈다’는 협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정의부 요원들이 국내로 들
어오는 등 절차가 진행되었으나, 일이 큰 만큼 노출이 쉬웠고 불신자의 밀고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만 당시 심문조서를 보면, 보천교 서(西)방주 김정곤
도 한규숙 집에 머물렀던 요원들에게 “우리들 교주 선생도 만주의 독립단과 제
휴하고 일하는 것을 희망하고 있으므로 자네도 열심히 아무 걱정없이 진력하여
줄 것을 부탁한다”고 했고, 메이지대학을 수료하고 정의부 제4중대 임시특파원
명목으로 국내로 들어온 요원[정찬규]도 처음에는 차월곡의 의견이 어떤지 불분명
하여 조심스럽게 활동했으나, 차월곡의 뜻이 명확히 판명되자 준비를 마치고 적
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하였다. 민족운동에 대한 보천교와 차월곡의 의도를 확인
하기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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