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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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이었다. 매헌의 친동생, 윤남의(尹南儀)의 증언에 의하
면 밤늦게까지 매헌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
다. 도중도 인근 까막고개 소재 오치서숙(烏峙書塾)에
서 수학하면서 삼십 리 길을 걸어 예산 읍내에 나가
<동아일보>와 <개벽지>를 구하여 읽었다. 신학문을
접하지 않았으나, 늘 새 세계를 동경하였다. 그러다
가 매헌 열여섯 살 되던 해에 한 살 연상의 규수, 성
주(星州) 배(裵)씨, 배용순과 결혼하였다. 유독 감나무
가 많았던 시량리(柿梁里) 맞닿은 수암산 아래, 신리(新
里)가 처가였으니 실상 동네 혼인이나 진배없었다. 윤봉길의 부인, 배용순
천도교인 매헌 윤봉길, 훗날 매헌을 일러 천도교인
으로 이름함의 시초는 여기서 비롯된다. 매헌의 결혼이 곧 청년 농부 매헌의 천도교를
가름 짓는다. 결혼한 아내의 부친인 배성선(裵成善)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장인과 사
위 간 만남이다. 이 만남은 여느 옹서지간(翁婿之間, 장인과 사위)이 아니다. 배성선은 출생
(1868년) 이후, 평생을 동학에 바친 개혁과 혁신의 인물, 천도교도이었다. 매헌(1908년 출
생)은 피압박 민족으로 자유와 평화를 상실한 망국, 대한민국을 구할 폭풍과 번개의 의
협, 순국 청년과의 조우였다. 바로 이 순간이다. 이 순간이 매헌의 동학사상 생성 시점
이다.
회갑 근처의 장인 배성선은 매일 새벽 동틀 무렵 우물가에서 청수를 떠다 놓고, 동학
주문을 외웠다. 배성선은 매헌에게 말했다.
이것은 수련이다. 이렇게 하면 신기한 힘을 발휘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고, 신들
림을 현현한다. 동학은 한마디로 성(誠)과 경(敬)과 신(信)이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염원하며 자각(自覺), 자생(自生), 자주(自主)를 토대로 천도교에 몰
입하는 장인을 만나면서부터 매헌은 유년 시절부터 귀로만 듣던 동학의 실체를 접하
였다. 경이로움은 곧 새로움이다. 서학의 야훼, 천주를 능가하는 존재로 상제, 곧 하날
님을 인지하고 막연하게나마 서서히 그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거기에는 그 이전부터
시량리와 근거리였던 근동의 예산군 하포리 출신, 춘암 박인호 천도교 교주 위명도 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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