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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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김좌진은 이후에도 계속 차

                          월곡과 접촉했다. 일본 관동
                          청 경무국의 보고서(1924. 11.

                          26.)를 보면, ‘10월 초순에 보
                          천교 교주 대표가 영고탑(寧

                          古塔)에 와서 2만여 엔의 군자
                          금을 주었다. 김좌진은 이 돈
                          으로 포교와 무장대의 편성

                          을 계획해 동녕현에 들어가려
                          했다.’고 적혀 있다. 이 무렵
                                                          「김좌진 군자금을 얻다」 (關機高授 第32743號, 1924. 11. 26)
                          북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이
                          1925년 3월에 영안현(寧安縣)에서 신민부를 조직했고, 김좌진도 대한독립군단의

                          대표로 참석해 군자금 확보에 노력하고 있었다. 다른 자료를 보면 ‘김좌진은 9월
                          상순 교주 차월곡으로부터 5만 엔을 받아 옛 부하들을 소집해 무력행동에 나섰

                          다’고 기록되었다. 보고서의 생성 일자가 유사하여 동일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2만 원과 5만 원의 차이가 관심사이다. 당시 2만 원도 적지 않은 돈인
                          데, 5만 원이라면 현재 가치로 20억 정도로 볼 수 있다. 차월곡에 대한 부정적 시

                          선이 한순간에 바뀔 수 있는 자료들이다. 몇 년 전에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학술
                          대회에서 이 사실들이 논의되었지만, 그 후 뚜렷한 진전은 보이지 않아 안타깝

                          다.



                          4) 보천교와 정의부
                            1925년, 만주에서 1924년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와 관련된 보

                          천교의 군자금 모집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는 보천교가 시국대동단의 운영으로
                          사회적으로 친일단체라는 질타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 와중에 1925년 4월, 경

                          성에서 조만식(趙晩埴)이 보천교 선포사였던 박자혜를 만났고, 이를 통해 보천교
                          의 북(北)방주였던 한규숙을 만나게 된다. 박자혜는 단재 신채호의 부인으로 경성

                          에 들어와 산파소를 운영하며 독립활동가들을 돕고 있었다. 이후 이 사건은 조
                          만식 등이 정읍 보천교 본소에 가서 차월곡을 면담하는 데까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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