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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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7·8
또 1921년부터 개최 논의가 시작된 워싱턴의 태평양회의에 임시정부에서도
요원들을 보내기로 결의했는데, 그 비용을 태을교가 부담했고, 1922년 9월에는
서로군정서의 군무국장인 최윤동이 독립운동 자금을 위하여 보천교 본부에 보
관 중인 3만 원의 현금을 확보하고자 할 정도였다. 이 무렵에 언론에서도 보천교
의 항일기사가 넘쳐났다. 한 예로 <동아일보>의 1922년 12월 23일자의 한 면이
온통 태을교 항일활동 관련 기사로 채워질 정도였다.
2) <국민대표회의>와 의열단
상해의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면서, 1921년 8월에 긴밀히 협의하여 참석할 대표자 125명을 선정했다.
여기에 보천교 측 대표로 보천교진정원에서 배홍길(裴洪吉)과 김종철(金鍾喆), 보천
교청년단 대표 강일(姜逸)이 참석했던 것이다. 국내 대부분의 단체들이 1~2인을
대표로 보냈고 천도교 측이 3명의 대표를 보냈다. 이렇듯 보천교가 국내외 각지
의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참석하는 상해 민족대표회의에 3.1운동을 주도했던
천도교와 더불어 3명의 대표자를 보냈다는 사실은 당시 보천교 교단이 항일활
동에 기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국내외적으로 인지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렇지 않았다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려 해도 다수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
에 의해 거부될 것이 틀림없었다. 또 이렇게 상해의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의
진정원 대표와 청년단 대표의 지위를 갖고 세 명이 참석하는 일이 차월곡 모르게
진행될 수 있었을까? 만약 일이 잘못되면 교주 차월곡이나 보천교 교단에 닥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은 상식이다. 오히려 차월곡은 진정원 혹은 참석자들의 적
극적인 요청에 응했거나, 아니면 국민대표회의 참석을 지원했거나, 소극적으로
생각한다 해도 최소한 묵인하지 않았을까.
<국민대표회의>가 끝나자, 보천교 대표로 참석했던 세 사람 모두 의열단에 입
단한다.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은 직접 배홍길과 강일에게 국내로 들어가 단원과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밀명을 내려 밀파했다. 그동안 확인되지 않았던 또 한 사
람 김종철의 행적도 찾아냈다. 김종철도 같은 해 의열단에 입단해 1928년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렇게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보천교 대
표 3인 모두가 의열단에 가입해 이후 독립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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