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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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 보천교의 항일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이것도 차월곡과 관련
없는 개인적 동기이며 우연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전반기 보천교
의 성장과 발전과정에서 항일과 관련된 보천교의 흔적들을 생각해 본다면, 차월
곡은 처음부터 이러한 상황들을 인지했고 더 적극적으로 생각한다면 지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3) 차월곡과 김좌진
일제강점기 항일항쟁의 금자탑이자 조선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심어준 1920
년 청산리 전투. 이 싸움에서 대승을 이끈 주역 중 한 사람이 김좌진 장군이다.
그는 1922년에 들어서면서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면서 독립군 충원과 군자
금 확보를 상당히 고민했다. 이 때, 앞서 보았던 서로군정서의 최윤동처럼, 김좌
진도 국내로 눈을 돌려 보천교의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
듬해인 1923년 7월에 김좌진은 참모인 유정근을 국내 경성에 잠입시켰다. 유정
근은 천안 출신으로 본명이 유민식(兪民植)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활동한 주역 중
한 명이다. 잠입 목적은 두 가지로, 국내 유력자들로부터 무기구입 자금을 확보
하는 것이고, 또 부족한 독립군 병력을 충원할 방안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
를 위해 김좌진의 밀서, 곧 ‘약 300만 명의 교인을 거느린 보천교 교주 차경석을
북만주로 불러들여 조선독립운동에 가입시킨다’는 밀서를 지니고 왔다. 차월곡
을 만주로 불러들인다면, 원하는 두 개의 목적이 전부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보천교의 많은 교금을 활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김좌진의 독립군단 조직
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할 수 있고, 또 보천교의 다수 교인을 군적에 넣어 독립군
으로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은 당시 보천교도였던 신찬우(申贊雨)에게도 협력하도록 밀서를 보냈는
데, ‘우리는 이미 수만 명의 병력을 훈련시켜 국내로 진공(進攻)할 기회를 기다리
고 있으나, 무기 등 군수(軍需)가 부족한 상황이라 참모 유정근을 파견하니 적극
협력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신찬우는 1921년 경기도 진위군(현재 평택시)에서
<진위청년회>를 조직해 문화운동과 청년운동을 주도했으며, 1926~1930년 청
북면장을 하였다. 안타깝게도 유정근이 체포되었고, 계획은 틀어졌다. 다만, 모
금된 군자금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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