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월간 대한사랑 7.8월호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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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종교행사비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아쉽
다. 이 자금이 몰수되지 않고 쓰일 곳에 사용되었다면 그 후 상황은 많이 달라지
지 않았을까. 그로부터 3개월 뒤 3.1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Ⅲ. 1920년대 보천교의 독립운동
1919년의 3·1민족독립운동은 차월곡의 교단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운
동을 주도한 천도교 세력이 큰 타격을 받아 일부가 만주지역으로 터전을 옮겼으
며, 대종교도 일찍이 만주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국내에서 보천교는 커다란 성장
의 기회를 맞았고, 그런 만큼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의 ‘유사’ 종교정책의 주
대상은 차월곡의 보천교가 되었다. 사람(교도)들이 차월곡 교단에 모여들고 이에
따라 상당한 교금도 확보됐던 것이다. 차월곡은 교도들의 수적인 증가에 따라
조직을 정비하여 기존의 24방주제를 1919년 말에 60방주제로 확대했다. 1921
년에 고천제를 올려 교단 창립을 공식화했고, 1922년 1월에는 서울에 보천교 경
성진정원(眞正院)을 개설했다. 이후 전국 주요 도시에는 진정원, 각 군(郡) 지역에는
정교부(正敎部)를 개설해 나갔다.
이제 당시 급증하고 있었던 민족운동 곧 국외 항일투쟁을 지원하는 군자금
모집 운동이나 실력양성론 등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역량도 갖추었다.
1920년대는 보천교 독립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차월곡은 물산
장려운동에 참여했다.
“보천교에서는 1923년 음력 정월 1일부터 자작자급을 하기로 결의하야
만장일치로 가결된 바 순 朝鮮産으로 의복제도를 개량하며 일상생활에
대한 일용품도 가급적 조선산만 사용하기로 각 지방에 통지하고 모범하
기 위하야 정읍 중앙본소에서 第1步로 실시에 就하얏다더라.”
(『조선일보』 1923. 2. 6.)
<조선물산장려회>가 음력 정월 1일부터 조선에서 생산한 의복 등을 입기로 결
의했던 것처럼, 보천교 교단에서도 의복과 일용품 등을 조선에서 생산한 제품만
을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각 지방의 진정원에 통보했다. 본소가 자리한 정읍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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