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5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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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6
공황후조>를 대륙진출의 사료로 강조하며, 그 근거 찾기에 몰입했다. 그러기 위
한 기초 역사 논리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임나’를 한반도 남부에 설정하는 것
이었다. 그래서 그것에 가장 부합되는 유적으로 「광개토태왕비문」으로 정하고
“임나가라” 라고 비정하였다. 이어서 『삼국사기』「강수열전」의 “임나가량(라)”, 진
경대사탑비의 “임나왕족” 기록을 한반도 남부에 임나가 존재했다는 증거로 삼았
다. 일제는 1920년 조선총독부 국정교과서격인 『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를 통
해 조선인들 교육에 돌입하였다. 이때 등식으로 설정한 논리가 “가야 = 임나” 라
는 것이다.
“
임나가 가야이며
임나가 한반도 남부임을 교육시킨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
”
번 역
임나라는 국명은 조선에서도 옛날부터 보인다.
또한 이를 임나가라라고도 불렀다.
그 예증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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