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5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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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6
의 뜻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여 충 종 원년 소환되어 찬수관(撰修官)이 되었
절을 지킨 두문동(杜門洞) 72인 중 한 분 으며, 내각의 비장 서적을 열람하고, 귀
이다. 범장은 태조 이성계가 세 번이나 양살이 시절에 노학자들에게 들은 내용
불렀으나. 출사하지 않고 고향 금성으 을 바탕으로 66세 때인 1520년에 『태
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사후 후덕군(厚 백일사』를 지었다. 9천 년 동방 한민족
德君)에 봉해졌고, 묘는 고향인 광주광 사의 혈맥을 펼친 8권의 보배로운 기록
역시 관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에 자리한 을 『태백일사』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나
다.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
학에 위배되는 학설을 조금도 용납하지
『태백일사(太白逸史)』는 일십당(一十堂) 않는 세태 때문에 책을 세상에 내놓지
이맥(李陌)이 지었다. 본관은 고성(固城), 도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자는 정부(井夫), 『단군세기』를 지은 행 때까지 집안에 깊이 감추었다. 묘는 성
촌 이암의 현손(玄孫)이다. 조선 연산군 남시 도촌동에서 1990년 충남 연기군
때 문과에 급제하고(1498), 연산군이 총 서면 용암리로 이장 되었다.
애하는 장녹수의 집을 너무 크게 짓는
다고 바른말을 했다가 미움을 사서 괴 운초 계연수는 1898년 『단군세기』
산으로 귀양을 갔다(1504). 2년 후인 중 와 『태백일사』를 간행했다. 이어서 안
이맥 선생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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