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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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6
국이 2002년부터 추진한 동북공정은 정한 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내려온 것
물론, 우리 곁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 이다.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에 우수한
은 친일 잔재에 대하여 자세하게 밝혀 문화재가 얼마나 많은데, 남대문이 왜
놓았다. 먼저 놀란 것은 숭례문(남대문)이 국보 1호인지 의문조차 갖지 않았으니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라는 사실과, 국 어리석었다.
보 1호로 지정되게 된 과정이다. 국보나
보물은 그 나라에서 가장 문화사적 가 20년간 경기도 문화관광해설사로 활
치가 높은 것으로 지정하는데, 일제는 동하며 역사에 빠져들었다. 문화유산
숭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을 조선 점령 기행수필을 쓰면서 우리 역사가 사실
기념물로 삼기 위해 국보와 보물로 지 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자료를 두루 찾
정했다. 일제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아보았지만, 내용은 거의 비슷해 답답
그것도 모자라 그것을 기념하고자 한양 함은 풀리지 않았다. 바른 역사를 알려
을 드나드는 숭례문을 국보 제1호로 지 주는 곳도 물어볼 사람도 곁에 없었는
정했다. 데, 역사 복원 운동을 하는 대한사랑을
조선의 수도 한양에는 경복궁을 중심 만났으니 칠흑의 바다에서 등대를 만난
으로 동서남북 네 방위에 사대문(東-흥인 것처럼 반가웠다. 대한사랑은 가끔 행
지문, 西-돈의문, 南-숭례문, 北-숙정문)이 있었 사 자료와 정보를 보내주었고, 궁금한
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한국 주차군사 것이 많은 내게 우리나라 바른 역사를
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교통이 불
편하다는 이유로 사대문을 전부 폭파하
자고 했다. 당시 일본 거주민단장 나카
이 키다로가 ‘임진왜란 때 선봉에 섰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함
께 숭례문을 통해 입성했으니, 숭례문
을 개선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만류했
다. 조선을 침략한 두 왜장은 우리 국토
를 짓밟고 수많은 백성을 학살했다. 일
제는 돈의문과 숙정문은 대포로 무너뜨
리고,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조선 점령
기념물로 삼기 위해 국보와 보물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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