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8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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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꾸었다는 매화나무는 5백 여 년의 풍상 세 때 생애 최초로 단성 현감이라는 벼슬
을 겪으며 아름다운 꽃을 피어왔는데, 세 을 제수 받았으나, 아래와 같은 사직소(辭
상 사람들은 이 매화나무를 남명매라 불러 職疏)를 임금(명종)에게 올리고 벼슬길에 나
왔다. 해마다 3월 무렵 연분홍의 꽃이 피 아가지 않았다.
는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는 불의와 타협
하지 않는 선생의 고결함이 스며있는 듯하 전하의 어머니(문정왕후)께서는 신실
다. 하고 뜻이 깊다고는 하나 실은 구중
남명은 조선 성리학 발전에 큰 업적을 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남겼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같은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선왕(先王)
해 태어나 동시대를 살면서, 낙동강을 사 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백
이에 두고 ‘좌퇴계(左退溪)’ ‘우남명(右南冥)’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재앙들을 어찌
으로 불리었으며,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 감당할 것이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로 우뚝 솟은 거유(巨儒)였다. 그런데 남명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은 성리학을 중시하면서도 천문, 지리, 의
학, 복서, 병법 등의 잡학에도 능통하였다. 이것이 이름 없던 한 시골 선비에 불과
선생은 학문이란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 했던 남명을 조선 팔도에 알렸던 그 유명
고 실질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 한 ‘단성 현감 사직소’이다. 역사에서는 을
던 것이다. 남명을 따르는 소위 남명학파 묘년에 올린 사직소라고 하여 ‘을묘사직소
는 성리학의 이론에만 연연하지 않고 실천 (乙卯辭職疏)’로 많이 알려져 있다.
궁행(實踐躬行), 즉 몸소 갈고 닦은 것을 행 이처럼 남명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
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 로 외척 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렬히 비
랐다. 후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의 판하면서 임금이 더 분발하여 명군(明君)의
정신을 이어받은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반열에 오르기를 주청 드리며 미련 없이
내암 정인홍 등 당시 의병장으로만 활약한 벼슬을 던져버린 것이다. 궁궐의 가장 큰
제자들이 50여명에 이르렀으니 남명의 경 어른이며, 상감의 생모를 일개 여염집 과
의(敬義)정신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부에 비유한 상소문을 받아 본 임금과 윤
있다. 대비는 얼마나 진노하였겠으며, 조정 중신
을묘사직소 들은 또 얼마나 겁에 질렸겠는가?
평생토록 경의(敬義)정신을 지킨 남명 선 이 일을 계기로 선생의 명성은 삼남(三南)
생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선생의 나이 55 지역은 물론 저 멀리 한양의 선비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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