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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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6


                            였다. 만일 그 전부가 다 남아 있으면 우리의 옛 역사 연구에 얼마나 큰 힘이

                            되리오.



                           단재는 「신지비사」의 전문(全文)이 전해지지 않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는데, 『환단
                         고기』의 「단군세기」 <6세 달문(達門) 단군조>를 보면 전문(全文) 36구 180자가 온전

                         히 전해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은이와 지은 시기, 지은 장소, 지은 목적까
                         지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2. 「신지비사」에 대한 역대 언급

                           「신지비사」라는 말이 처음 보이는 곳은 『삼국유사』 「흥법(興法)」의 ‘고구려의 보

                         장제가 노자를 숭봉하자 보덕화상이 절을 옮기다(寶藏奉老 普德移庵)’ 조문이다. 이곳
                         에 “『신지비사』의 서문을 살펴보면 ‘소문(蘇文) 대영홍(大英弘)이 서문을 쓰고 아울러

                         주석을 달았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위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시대 때 『신
                         지비사』가 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가 있다.

                           「신지비사」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곳은 『고려사』 열전의 「김위제전(金謂
                         磾傳)」이다. 그는 『신지비사』의 10구를 인용하면서 중경(中京)인 송악(松嶽)과 서경(西
                         京)인 평양을 이어 지금 서울의 남산 부근 목멱양(木覓壤)에 남경(南京)을 건설할 것을

                         고려 숙종(1095~1105)에게 건의하고 있다. 숙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1101년
                         궁궐 공사에 착수 1104년 5월에 남경의 궁궐을 완성하였다. 그가 주장한 논거는

                         저울론으로 개경은 저울대-칭간(稱幹), 서경은 저울판-극기(極器), 남경은 저울추-칭
                         추(秤錘)에 해당되는데, 삼경은 설치하면 70국이 항복하고 또 남경은 5덕(수화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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