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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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6
높았던 것을 볼 수 있는데, 내몽골 오한기 지역은 현재보다 인구밀도가 높았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있다. 이들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는
데, 그 규모는 강을 따라 몇 킬로미터까지 이어지는 곳도 있다. 따라서 어떤 곳
은 몇만 명의 인구들이 모여 살았다는 뜻이다. 당시 주거 유적의 특징을 보면
신분이 구분된 사회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예를 들면 성(城) 안에서 주로
생활을 한 계층과 성 밖에서 생활한 계층으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집의 크기와
무덤 역시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런 것들은 당시가 신분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제사의식이 치러진 유적도 존재했다. 신분사회였
다는 전제 조건은 어떤 형태로든지 조세 제도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을 것이다. 조세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곧 국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적봉(赤峰)시 이도정자(二道井子) 하가점하층문화 주거 유적
요동 지역에서도 집단생활을 한 특징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 그러나 요동 지
역은 주로 산지들이 많고, 요서 지역은 평지가 많아 인구수를 볼 때는 요서 지
역이 훨씬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요동 지역의 인구밀도는 거대한 고
인돌의 존재에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 수가
많지 않지만, 이전에는 매우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의 규모로 볼 때 요
동 지역 역시 인구가 많았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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