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월간 대한사랑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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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신라는 본래 조선의 유민(先是, 朝鮮遺民.)’이라는 대목이 있다. 신라는 곧 단군조
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명기함으로써 그 근본을 명확히 했다는데 의미가 매우
크다. 「고구려본기」 <동천왕조>에도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집’이라
고 간단하게 언급했지만, 단군조선에서 이어졌음을 전하고 있다. 「백제본기」에
는 단군조선과 관련된 기록이 없고, 대신 조선 영조 때 『승정원일기』에는 신라
와 백제가 단군에게 1년에 두 번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의 단군조선 인식
『삼국유사』 「기이」편을 보면, 단군조선의 건국 과정을 전하고 있고, 이승휴
의 『제왕운기』에서는 단군조선을 시작으로 고려까지 한국사의 계보를 전하고
있다. 당시 고려인은 고려사의 정통으로서 단군조선을 인식하고 있었고, 권근
은 『양촌선생문집』 「참성초청사(槧城醮靑詞)」에서 왜구의 침략 등 고려가 처한 어
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강화도 참성단에 가서 단군께 호소한 것을 볼 때, 단군은
고려의 국조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 영조 44년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유신(儒臣, 문사(文詞)를 담당하는 신하)에게 『고려사(高麗史)』 첫 권
(初卷)을 가지고 입시케 하여 ‘단군편’을 읽으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조선
시대에 현전하는 『고려사』와 다른 단군편이 실린 『고려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조선시대의 단군조선 인식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대는 『동국통감』을 기반으로 하
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단군은 국가의 시원으로서 명확하게 인정하고 있었지
만, 어느 순간부터 단군보다 ‘기자(箕子)’가 더 중요시되기 시작했다. 『동국사략』
을 보면 단군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는데, 이런 인식은 조선시대에 줄곧 통용되었다. 그럼에도 『조선왕조실록』에
는 전반에 걸쳐 단군을 국조로 인식하였고, 이런 인식은 조선 후기에 한층 더 굳혀졌
다. 『승정원일기』에서 영조는 단군을 ‘동방의 천황’이라고 직접 명시하고 있다.
단군은 동방에서 중국의 천자보다도 더 높은 지위를 가진 제왕으로 인식되었
는데, 헌종은 단군이 어떻게 탄생하였고, 그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밝히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단군에 대한 인식을 보면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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