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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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당한 상태였어요. 심지어는 이완용한테도 연락을 했지만, 상것들의 종교
라면서 무시해 버린 거예요. 그때 개신교 신도 수가 전체 국민의 2%정도인
20만 명도 안 되던 때인데 ‘독립청원’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거예요.
당시 우리나라에 개신교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있었는데, 두 세력이 똑같
이 ‘독립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천도교에서 ‘독립선언’을
하자고 하니까 처음에는 거부했어요. 독립청원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무슨
독립선언이냐는 거였죠. 그런데 나중에 개신교 쪽에서 자신들은 돈이 없으
니까 5천원을 지원해주면 참여하겠다는 연락이 온 거죠. 결국 손병희 선생
이 5천원을 지원해 주면서 개신교가 참여하게 된 거예요. 그러면서 민족대
표 33인 명단에는 각 종단별(천도교,불교,개신교)로 11명씩 들어가게 돼 있
었어요. 그런데 지원금이 들어오니까 감리교와 장로교가 서로 들어가겠다
고 싸움이 벌어진 거예요. 당시 불교계는 스님들이 대부분 산에 거처하고
있어서 참여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한용운, 백용성 두 분만 참여했는데
한용운 선생이 개신교 쪽에 싸우지 말고 들어갈 만큼 들어가라고 양보를
했죠.
그래서 장로교와 감리교가 각각 8명씩 16명이 들어가고 불교계에서 2명
이 들어간 거예요. 나머지 15명은 천도교에서 다 채운 거죠. 천도교는 명단
에 들어갈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에서도 다 양보한 후에 대표 33인을
채운 거예요. 당시 개신교에 지원한 5천원은 쌀값으로 치면 50억, 집값으로
치면 250억은 더 된다고 경동교회에 강연을 갔을 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최원호: 단순히 3.1혁명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의 종교별 참여 숫자를 가
지고 어설픈 해석을 하면 안 되겠네요.
임형진: 맞습니다. 그리고 서명을 한다는 것은 사실 죽으러 가는 순서예요.
독립선언서를 쓰고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은 죽는 거예요. 특히 제일 먼저
쓰는 사람이 주목이 되는 거잖아요. 바로 손병희 선생께서 “당연히 내가 먼
저 썼다.”고 하셨죠. 그 뒤에 감리교 김선주 목사가 쓰고 장로파가 쓴 뒤에
가나다순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리고 비폭력운동을 가지고도 말이 많은데
요. 1919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던 일본 무장병력인 헌병대, 경찰대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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