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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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하셨죠. 어떻게 일본하고 결탁하면서 을사늑약을 찬성한다고 할 수 있냐
면서요. 전국의 동학도들이 일순간에 친일파들로 오해를 받게 된 거잖아요.
『동경대전』에 보면 ‘학(學)으로 보면 우리 땅에서 나왔기 때문에 동학(東學)
이지만 도(道)로 따지면 하늘의 도를 받았기 때문에 천도(天道)다.’라는 구
절이 나와요. 그래서 손병희 선생이 1905년 12월 1일에 ‘천도교’로 바꾸는
거예요. 당시 고종황제가 어떤 종교든지 다 허용한다는 명령을 내렸는데,
활동을 위해 동학에게 종교적 외피가 필요했던 거예요.
최원호: 대일항쟁기에 천도교의 대표적 활동이 1919년 3.1운동입니다. 의암
선생님의 3.1운동 전후 활동을 말씀해 주시죠.
임형진: 의암 선생의 스케일이 지금 생각해도 이해를 못할 정도예요. 당시
<만세보>를 만들어서 천도교인들에게만 돌린 게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다 나눠주는 거였어요.
그리고 우리가 3.1혁명하면 대부분 유관순 열사만 생각하잖아요. 물론
위대한 분이예요. 그렇지만 유관순 열사는 3.1혁명 때 16살로 무슨 조직과
돈이 있었겠어요? 돈과 조직이 있어야 독립선언서도 인쇄해서 전국에 뿌리
고 3월1일에 서울과 평양을 포함한 다섯 개 도시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날
거 아니에요. 천도교 보성사에서 3만 5천장을 인쇄하고 종교조직을 이용해
서 전국에 뿌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3.1운동을 제2의 동학혁명이라고 말하
는 거예요. 당시 3.1혁명의 지도자는 명백하게 손병희 선생이셨어요. 또 손
병희 선생이 동학혁명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화하자는 거였고 또 일
원화를 주장한 거죠.
최원호: 3.1혁명 민족 대표 33인의 종교인 분포를 보면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은데, 천도교가 주도하게 된 실제적인 배경을 설명해 주시죠.
임형진: 손병희 선생은 독립운동 방략으로 세 가지를 설정합니다. 대중화,
이론화, 비폭력. 대중화는 혼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동학혁명 때는 동
학도들만 했기 때문에 실패한 걸 뼈저리게 느낀 거예요. 그래서 독립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당시 고관대작들과 종교 단체들에 연락을 했는데, 다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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