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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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제 3대 교주인 손병희 선생께서 동학에서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
전후의 과정을 좀 설명해주시죠.
임형진: 의암 손병희 선생은 사실 동학혁명의 기수였어요. 흔히 남접과 북접
을 얘기하는데, 그냥 편의상 일부가 호남 지역에 있었던 동학도들을 남접이
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북접이라고 하는 것도 존재했던 것이 아
니에요. 오지영 선생이 『동학사』에서 그렇게 규정을 해놓는 바람에 굳어진
개념이 된 거죠. 북접이든 남접이든 최고 지도자는 해월 최시형, 한 분이었
어요. 모든 도첩이 나갈 때 해월의 직인이 찍혀서 나갔어요. 그래서 해월을
법헌이라고 불렀어요. 전봉준 장군도 체포돼서 공초 받을 때 어떻게든 최법
헌을 보호하려고 할 정도였어요. 그런 해월이 총기포령을 내리면서 호남 지
방의 지도자로는 전봉준을 인정해요.
그런데 나머지 지역인 충청도·경상도·황해도·평안도까지는 손병희를 통
령(統領)으로 삼은 거예요. 1894년 10월에 두 사람이 논산에서 만나 의형제
를 맺었는데, 전봉준 장군이 40세이고 손병희가 34세였어요. 당연히 전봉
준 장군이 형이 되는 거죠. 두 사람이 의형제를 맺고 공주를 넘어서 서울로
진격하자고 해서 공주를 향해서 가다가 우금치에서 패배한 거예요. 그 이후
전봉준 장군은 퇴각하다가 순창에서 체포가 되고, 손병희 선생은 해월 최시
형 선생을 피신시키기 위해 달아났어요. 서로 각자 가는 게 유리하니까 헤
어진 거예요. 다음 해에 전봉준뿐만 아니라 김개남 등 동학군 지도자들이
다 체포돼서 처형을 당하잖아요. 손병희 선생이 가장 숨기고 싶었던 분이
해월이었는데, 그 분도 1898년에 원주에서 체포가 돼요. 결국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지도급 인사들이 다 처형을 당한 거예요. 의암 손병희만 살아남은
거죠.
최원호: 동학혁명 당시 손병희 선생의 역할을 이해할 필요가 있군요
임형진: 그리고 기록은 없지만 해월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도통을 전수
한단 말이에요. 체포되기 전인 1897년에 경기도 여주에서 해월이 의암에
게 “이제 다음은 너다.” 라고 지명을 해요. 그래서 의암 손병희가 3대 교주
가 된 거예요. 근데 해월이 의암에게 도통을 넘기면서 단순하게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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