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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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없지만 정치사를 하는 학자로서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하여간
그래서 의암이 살아남아요.
최원호: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어떻게 되나요?
임형진: 예. 그런 과정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께서 위기의식을 느끼게 돼요.
그래서 미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용구와 동생인 손병흠만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어요. 하지만, 당시에 미국으로 바로 갈 수 있는 방
법이 없어서 먼저 일본으로 갔어요. 그런데 일본 오사카에서 미국 가는 배
편이 너무 비싸고 신분 노출 등의 어려움이 있어서 일본에 눌러앉게 됐죠.
1901년에 갔다가 중간에 한 번 왔었는데, 결국 한 4년 정도를 일본에 계시
게 돼요. 거기서 의암 선생께서 앞선 일본 국민들의 의식과 위생 개념들을
보면서 많이 놀라셨어요.
그래서 당시 비서실장 역할을 하던 이용구를 보내서 1904년에 소위 갑진
개화운동을 벌인 거죠. 위생을 위해 검은 옷을 입고 상투를 자르자. 백의민
족으로 흰 옷이 보기는 좋지만, 빨래를 많이 해야 하니 여자들이 얼마나 힘
들었겠어요. 단발흑의(斷髮黑衣)운동을 전개하는 거예요. 그때 이용구를 통
해서 명령을 했는데, 20만 명이 실천하니까 엄청 놀랐다고 해요. 그래서 민
간 조직인 ‘진보회’를 만들어요.
최원호: 손병희선생께서 이용구를 앞세워 진보회를 조직하게 되었군요.
임형진: 예. 그런데 의암 선생이 일본에 계시면서 이용구를 통해서 계속 지
시를 내렸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긴 거죠. 이용구가 동학혁명 당시에는 아주
최고의 명장이었어요. 그리고 의암 선생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거든요. 근
데 이용구가 권력의 맛을 알게 된 거예요. 그때 일진회를 만들었던 송병준
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이름만 있던 일진회의 송병준이 조직이 있
던 이용구를 매수했어요. 결국 손병희 선생의 명령이라면서 진보회를 없애
고 일진회로 통합을 선언해 버려요. 그리고 1905년 을사늑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해버린 거예요. 일진회가 지지 성명을 했는데 보니까 동학도들인 거
예요. 다 놀란 거죠. 뒤늦게 이런 소식을 손병희 선생님이 들으시고 노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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