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0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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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33세) 다시 상해로 와서 신규식이 세운 최초의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 생사를 같이 한다, 동주공제(같은 배로 같이 건넌다[同舟共濟]의 줄
                 임말)에 참여한다. 그리고 동제사가 설립한 박달학원에서 교육 활동에 힘

                 을 쏟는다. 이듬해 1914년(35세) 윤세용, 윤세복(대종교) 형제의 초청으로 만
                 주에서 동창학교 교사로서 국사를 가르친다. 이때 「광개토대왕릉비」를 비

                 롯하여 만주 일대 고구려와 대진국(발해) 유적지, 백두산을 답사하면서 단
                 재의 조선상고사 탄생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1915년(36세)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 후, 도서관에서 역사서를 탐독하며

                 ‘조선사’(훗날 『조선상고사』) 집필 구상 및 저술 활동을 한다. 1917년(38세) 26
                 년 망명기간 동안 단 한 번 친일파와 결혼하려는 조카를 설득하기 위해서

                 국내에 입국했었지만 실패하고서 가족의 연을 끊었다. 이해 대동단결선언
                 에 참여하였다. 1918년 북경의 보타암에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




                     1919년(40세)~1928년(49세)
                   3.1만세운동,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상해, 다시 북경)

                   1919년(40세) 2월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고, 4월 임
                 시정부발기회의인 ‘29인 모임’에 참가하였다. 7월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

                 원회의에서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맡는 등 임시정부에 적극 참여한다. 그
                 러나 제6회 임시의정원회의(1919.8.18.~9.17)에서 통합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자 적극 반대하고 나선다.

                   뜻이 통하지 않자 임정을 나와서 10월 <신대한>을 창간하여 주필로 활
                 동한다. 1920년(41세) 북경으로 돌아와 제2회 보합단(독립운동단체)에 참여하

                 였다. 이때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의 소개로 박자혜 여사와 결혼한
                 다. 항일 무장투쟁세력을 결집하기 위해 이회영, 신국, 박용만 등과 군사

                 통일촉성회를 조직한다. 1921년(42세) 중국인들과의 항일연대를 위해 순
                 한문잡지 <천고>를 발행한다.

                   1923년(44세) 의열단장 김원봉의 초빙으로 상해에서 그 유명한 「조선혁
                 명선언」을 작성 발표한다. 1924년(45세) 관음사라는 절에서 잠시 승려생활
                 을 하면서 「전후삼한고」를 집필한다. 그리고 자금성 도서관에 소장 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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