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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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2
송병준 조중응 신기선
‘일본의 3대 충노(忠奴)’로 볼 수 있는 단재의 성품
3대 충노: 송병준(1858~1925), 조중응(1860~1919), 신기선(1851~1909).
송병준과 조중응은 이완용 내각 대신으로 1907년 일본 통감의 통
제를 공식화한 정미7늑약(한·일 신협약)의 장본인(정미7적)들이고, 신기선
은 단재에게 서책을 빌려주어 신학문을 접하게 해주고, 성균관에 입학
을 권유했던 그 신기선이다. 단재는 신기선이 이등박문에게 돈 1만환
을 받아 유림들을 일제에게 복종케 했다며 그를 고발하였다. 과거의
인연을 생각하면 너무한 처사라 여겨지지만, 단재의 붓 끝은 예외가
없었다. 이런 단재의 강직함은 훗날 조카인 향란이가 친일파와 결혼한
다고 하여 인연을 끊은 것과, 친일파의 보석금으로 감옥을 나가기 싫
다고 한 사례로도 엿볼 수 있다.
1910년(31세)~1918년(39세)
망명, 역사서 집필의 대전환(집안, 아 고구려!)
더 이상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이 힘들다고 판단한 단재는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한다. 1912년(32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가 광복
회를 조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이어 나간다. 거기서 권업회(연해주 한인자치
단체)의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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