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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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을 펼친다. 1904년(25세)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산동학원을

                 설립하고 신교육 운동을 전개한다.
























                 단재사당 l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 고드미마을 소재




                     1905년(26세)~1909년(30세)
                   독립운동의 길(서울, 붓으로 호령하다)

                   1905년(26세) 성균관 박사가 되어 앞날을 보장받았지만, 곧 사임을 하

                 고 일본에 대항해 고향에서 애국계몽 운동을 지속한다. 낭성면에 온 장지
                 연(당시 황성신문주필)을 만나 그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기자가 되고,
                 1907년(28세) 사장이 외국인인 관계로 비교적 일제의 탄압과 검열에서 자

                 유로운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일제를 비판하고 역사를 새
                 롭게 해석하는 논설을 많이 쓰게 된다. 1908년(29세)에 ‘일본의 3대 충노(忠

                 奴)’,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등과 함께 그 유명한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
                 재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매일신보>의 사장이었던 베델이 일제
                 의 계략으로 죽게 되고, 단재는 신문사를 나왔다. 같은 해 『을지문덕전』을

                 발행하고, 이듬해(1909년) 『동국거걸 최도통(최영)전』을 출간하였다. 이 해
                 작년에 낳았던 아들 관일이 죽었고, 풍양 조씨 부인과는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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