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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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월 만주의 정의부가 국내로 요원(조만식)을 파견했을 때 보화

                 (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재한 것이 박자혜 여사였다.
                   당시 박자혜 여사는 보천교의 지방조직인 정교부(正敎部)의 간부였던 선

                 포사였다.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할 당시 서울의
                 길 안내를 했던 이도 박여사였다. 박 여사는 서울에서 산파일을 하면서 의

                 열단 등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이 국내에 잠입해서 활동할 때 거사를 도왔
                 다.





                     1929년(50세)~1936년(57세)

                   영원히 독립운동(여순, 죽어서도 독립)

                   1929년 4월, 7월, 10월 계속해서 재판이 열렸는데, 동포들의 방청이 많
                 아 삼엄한 경계 속에 진행되었다. 1930년(51세) 4월 28일 여순형무소로 이

                 감되었다.(죄수번호 411번) 10여 일 후 최종공판에서 일제에게는 단재가 위험
                 인물이었기에 10년형을 받는다. 재판과정에서 단재는 ‘독립을 위한 모든

                 일은 죄가 될 수 없다’며 당당히 밝혔다. 이 해 홍명희의 주선으로 <동아
                 일보>에 연재됐던 논문 6편을 묶어 『조선사연구초』가 발간된다. 1931년

                 (52세) 안재홍과 신백우의 주선으로 <조선일보>에 ‘조선상고사’와 ‘조선상
                 고문화사’를 연재했으나, 면회 온 기자에게 보완 및 수정이 필요하다며 연
























                 조선사ㅣ1931년 6월 10일부터 <조선일보>에서 연재된 ‘조선사’(1948년 『조선상고사』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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