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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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를 비롯해 고서를 두루 읽게 된다. 이해 다물단(무장독립단체)을
창단한다. 1925년(46세)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만필>, <평양패수고> 등
을 연재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 대사건」 등의 논문
을 발표한다.
1926년(47세)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에 가입, 독립운동의 탈출
구를 모색한다. 1927년(48세) 홍명희와 안재홍의 요청으로 좌우합작 단체
인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1928년(49세)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 회
의를 개최하고 선전물 발행과 폭탄제조소 설치 자금을 위하여 5월 8일 대
만 지룽우체국에서 ‘유문상’이라는 가명으로 현금수령을 기다리다 붙잡혀
‘외국위체위조사건’ 죄목으로 대련 형무지소에 수감되었다.
독립운동가 박자혜 여사(1895~1943)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 승인면 수유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강
북구 수유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입궁해 10년 동안
궁중생활을 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숙명여대 기예과에 입학해
근대교육을 받고 졸업 후 조선총독부의원 산부인과 간호부로 취업하
였다. 삼일만세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간우회’를 조직했는데,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북
경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20년 봄에 단재 선생님
과 결혼을 하고, 1922년
둘째를 임신한 채 경제적
이유로 국내에 들어왔다.
1928년 12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신채호 부인 방문기’이다. 산파를 운영
하며 두 아들을 데리고 삼순구식(三旬九
食: 30일 동안 9끼밖에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함)으로 연명하며 다렌형무소에 있
는 단재가 무사하기를 바라는 애달픈 마
음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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