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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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2




                                          1880년~1897년(18세)

                                        나서 자라고(대전, 그리고 청주)

                                        할아버지가 벼슬에서 잠시 물러나 훈장으로 처가에 초빙되어 이주한 시
                                      기였던 1880년 12월 8일(음 11월 7일), 충남 대덕군 익동 도림리(현재 대전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에서 신광식님의 둘째 아들(신숙주 18대 손)로 태어났다. 후

                                      에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 이사하여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일
                                      찍이 조부의 한문 사숙에 입학하여 10세에 『자치통감』을 해독하고 행시(行

                                      詩:과거를 보는 데 18구 이상으로 짓는 시)를 짓는 등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산동
                                      (청주 상당산 동쪽) 3재’로 알려졌다. 16세에 풍양 조씨와 혼인을 하고 18세에

                                      한학자이자 중추원 부의장이었던 신기선의 목천 집을 오가며 새로운 책을
                                      많이 접하게 된다.(단재의 신新사상은 이 무렵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좌)신채호 생가지(현재 대전 중구 단재로 229번길 47, 대전 중구청 홈페이지), (우)신채호 선생 초상(청주)





                                          1898년(19세)~1904년(25세)

                                        배우고 가르치고(서울, 다시 청주)
                                        19세에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 당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게 된다. 20세에 아버지처럼 따르던 형, 신재호(28세)가 죽고, 22
                                      세가 되던 1901년 고향으로 내려와 신규식과 함께 문동학원을 설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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