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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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한국의 고유한 사상이자 주류였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본고에서는 간단하게 이 정도만 언급하고, 다음 호에 ‘전후 삼한’에 대
                 한 내용을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한국사가 바로잡히는 그날까지

                   선생은 사학계에서 ‘조선 역사학의 선구자’,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등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학계의 현실은 단재의

                 학맥이 아니라 이병도의 학맥이 지배를 하고 있다.
                   단재 선생에게 있어서 역사는 ‘가능성’이었다. 한번 일어났던 역사는 또

                 다시 일어난다고 보았다. 역사 연구에서 허위는 용납이 안 되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가능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진정한 독립을 위하여 진

                 짜 가능성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발로 현장을 누비며 진짜 역사를 찾아
                 다녔다. 누구보다 사실에 가까운 역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했다. 이제는 단

                 재 사학을 ‘민족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보편성을 약화시키지 말아야 한다.
                 단재사학은 ‘민족사학’으로서가 아닌 우리나라 ‘근대사학’의 효시로서 자
                 리매김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단재와 같은 민족사학자들은 일찍 죽고, 일본에서 공부하고
                 일제가 왜곡시킨 한국사 영향을 받은 이병도와 신석호를 중심으로 해방

                 후에 한국사가 교육이 된다. 그 결과, 나라는 독립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
                 국사, 특히 고대사와 국경사는 일본이 왜곡한 역사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일제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세수할 때도 꼿꼿하게 서서 세수를

                 했던 신채호 선생은 돌아가신 후에도 모욕을 당한다. 학계의 풍토가 그렇
                 다 보니 어느 학자가 학술회의에서 “신채호 선생은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
                 자이고,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입니다.”라는 막말로 공개적으로 선생을 모

                 욕을 준 것이다.
                   만주와 북경 등 역사의 현장을 발로 뛰면서, 일제가 왜곡하지 않은 도서

                 를 보며 공부한 단재의 학문을 자신들이 잘못 알고 있는 학설과 다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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