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3 - 월간 대한사랑 24년 1월호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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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나가면서 보는 것만이 가능하다. 안으 인상을 통해서 신라의 스케일을 확실히 실
로 들어갈 수는 없기에 유리창을 통해서 금 감하게 되었다.
강역사와 석굴암 본존불상의 모습만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유리막이 있지만 본존불상 문무왕릉과 감은사
을 보면 자연스럽게 두 손을 합장하게 되었 경주 감포 앞바다에 대왕암이 있다. 아들
다. 사진에라도 이 순간의 모습을 담고 싶었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
으나, 사진 촬영도 금지하고 있어 안타까움 해 가운데 큰 바위에 장사를 지낸 곳이다.
을 표현한 일행도 있었다. 문무왕은 죽어서도 용이 돼 나라를 지키고
싶은 마음으로 바다에 장사 지내달라는 유
원성왕릉 언을 남겼다. 그에 따라 대왕암 바위틈에 유
불국사와 석굴암을 다 보고나니 시간이 골함을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국용이
예상을 초과했다. 원래 가고자했던 <신라를 되어 조국과 후손들을 지키고 싶은 대왕의
빛낸 인물관>을 아쉽지만 통과했다. 고심 끝 염원이 느껴지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에 원성왕릉은 잠시라도 보고 가기로 했다. 감은사는 바다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인데, 이곳은 무 을 위해 신문왕이 지은 절이다. 그래서 아버
덤 자체보다는 무덤 주변의 무인상을 보려 지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의 감은사(感恩寺)
는 게 더 컸다. 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몽고 침입 때 불타
여기에는 당시의 신라 경주가 페르시아 서 주춧돌과 탑 두 개만 남아 있다.
역인 등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문물이 번창 하지만 이 남아있는 유적만으로도 우리에
했던 국제도시였다는 걸 알 수 있는 무인상 게는 큰 감동을 준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
이 있다. 이 무인상은 깊숙한 눈과 매부리코, 기를 쓴 유홍준 작가는 만약 감은사 답사기
아랍식의 둥근 터번, 헐렁한 상의에 치마 같 를 자기 마음대로 쓴다면 “아! 감은사. 감은
은 하의, 소그드인 스타일의 주머니 등이 전 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
체적으로 서역인 풍모를 하고 있다. 당시 페 은사”라고 감탄사만 쓸 것이라고 했을 정도
르시아인과 서역인은 신라의 금을 구하기 다.
위해 실크로드를 거쳐 경주 땅을 찾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는 만큼 이들이 실제로 경주 셋째 날 경주 동학 용담정 → 수운기념관
에 존재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겠다. 경 한국사에서 진정한 근대사의 출발은 동
주국립박물관에서 로만글라스 등 신라의 국 학이다. 최제우 대신사의 동학 창도야말로
제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을 보았지만 무 근대 한국 역사에서 일대 획기적 전환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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