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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분과
용어들과 일상 개념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반적 의미가 달라지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신이란 개념은 God을 지칭한다. 근대 일본인 학자들이 번역어로 선택한 용어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원시 시대부터 쓰여온 신 개념은 그 뿌리부터 다르다. 신화시대와 샤먼시대,
영웅시대와 제사시대로 대조되는 서양과 동양 문명의 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아시
아 신은 기독교 문명의 유일신, 인격신, 창조신, 초월신과는 명백히 다른 신이다. 동양철학 고전에
나타난 신 개념에 대한 정의를 일별해보기로 한다.
신 개념이 널리 유포된 시기 동양철학의 원전인 주역에 ‘음양불측지위신 (陰陽不測之神)’라는 구
절이 수록되었다. 10) 유가, 묵가, 법가, 도가 등 제자백가 시대를 거쳐 직하의 순자(298-238)를 위
시로 동아시아 고전 학문이 자리잡은 시기였다. 회남왕 유안(劉安)이 편찬한 <회남자>가 기원전
139년에 간행되었는데 신, 특히 정신에 대한 이론들이 수록되었다. 11)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황제
내경 본신 편 8장에는 ‘생지래자위지정 양정상박위지신 生之來者謂之精 兩精相搏謂之神’이라는 문
구가 있다. 12)
같은 신이라는 용어는 6-7세기 수 나라 때 음양학의 대가인 소길(簫吉)이 편찬한 <오경대의> 20
편 ‘논제신(論諸神)’에서 상세히 논의되고, 성리학자 장횡거(1020-1077)가 쓴 정몽(正蒙) 대화편
‘산수이가상위기 청통이불가상위신(散殊而可象爲氣, 淸通而不可象謂之神)’ 13) 이라는 문장으로 요
약된다. 어느 경우에도 신의 논의는 자연 공간과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소 이른결론
이지만 서양신인 God을 동양의 神이라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차라리 마테오리치(1552-
1610)가 칭한 천주,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상제라는 용어가 서양 신 개념에 근사하다.
유교의 5경 가운데 하나로 오래된 역사서 서경 (書經)에는 상제라는 명칭이 30번 이상 언급되고
있다. 14) 유교와 도교, 심지어 불교에서도 제석(帝釋)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원시시대 하늘을 경
외하던 천신 관념이 상제 개념으로 정착되었지만 동양의 신 개념은 역계사의 ‘불측지위신’ 개념처
럼 음양오행 자연현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불가지론적 자연천에 가깝다. 그러한 신개념으로는 무
소부재의 주재성, 전지전능의 영명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동양철학 고전에 나타난 신은 서양의 신(God)처럼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다. 유불선기 사교회통
을 주장할 만큼 동서양 신관을 융합하려 노력한 다석 류영모(1890-1981)는 ‘없이 계신 하느님’이
라는 표현을 창안했다. 15) 서양신학 전통에서 이단으로 취급받는 영지주의 (Gnosticism)는 불가
지론을 넘어 영성과 신비체험을 통해 신의 관념에 접근한다. 어찌보면 가장 솔직한 의미의 신관이
아닐까 싶다. 16)
10) 주역 계사전 상 5장.
11) 淮南子 精神訓 제1. 陰陽章 참조
12) 내경 본신 8장
13) 장횡거, 정몽, 대화편
14) 김영일, 『정약용의 상제사상』 (서울: 경인문화사, 2003) 137쪽.
15) 이정배 저, 『없이 계신 하느님, 덜 없는 인간 』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09)
16) 영지주의란 영적 지식(gnosis)을 추종하는 동방 종교와 희랍철학과 신지학(theosophy),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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