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2 - 국제학술문화제-천부경/국제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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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분과
「계연수기서」를 얘기하면서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천부경』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
고 있다. 이것은 본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오해이다. 「계연수기서」의 본문
어디에도 처음 『천부경』을 발견했다는 내용이 없다. 『광명장』의 「전문」에는 분명하게 “묘향산 석
벽에 새겨진 천부경 81자를 얻은 적이 있고”라고 말하고 있다.
2) 계연수는 실존인물
계연수에 대해서는 1969년 『해동인물지』에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계연수. 자는 인경, 호는 운초, 선천宣川에서 대대로 살았다. 이기의 문인이며, 백가서百家書를
섭렵하였으며, 무술년(1898)에 『단군세기』, 『태백유사』 등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기미년
(1919)에는 이상룡의 군정부軍政府 61) 소속으로 들어가 군사작전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경신년(1920)에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桂延壽 字仁卿, 號雲樵, 世居宣川, 李沂門人, 涉獵百家
書, 戊戌刊行檀君世紀, 太白遺史等書, 己未赴李相龍幕下, 參畫軍政有功, 庚申卒于滿洲). 62)
이유립은 『환단고기정해』(『대배달민족사』 1권)에서 계연수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계 스승(桂子)의 휘는 인수, 자는 인경, 호는 운초 또 일시당 주인이시니 계 스승의 조상은 선천
사람이다. 고종태황제 원년인 갑자년(1864)에 태어나 대대로 선천宣川에서 살았다. 어려서 부
모님을 여의었으나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백가서百家書를 섭렵할 때 한번 보면 바로 외웠고 말
년에 비로소 크게 깨우쳤다. 젊을 때부터 명산 승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도사와 뛰어난 승려를 찾
아 더욱 정진 수련에 힘을 다하고 환단 이래 전해 온 우리의 고유한 철학 사상을 탐구하여 일가지
견一家之見을 갖추었다.(桂子의 諱는 延壽요 字는 仁卿 號는 雲樵 又號一始堂主人이시니 其先
은 宣川人이라. 高宗太皇帝元年甲子五月二十八日에 生하야 世居宣川이라. 早失父母하고 生有
異質하야 涉獵百家書에 一覽輒誦이러니 晚乃大悟라. 自幼時로 遍歷名山勝地하고 歷訪道士·
異僧之門하야 尤致力於精進修鍊하고 探求桓檀以來固有哲學思想하야 以備一家之見矣라) 63)
『광명장』에서 계연수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61) 1919년 4월 이상룡이 부민단扶民團을 한족회韓族會로 개편하여 산하에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軍政
府를 설립하자 계연수와 단학회는 이상룡의 지휘에 소속되어 군정부의 계획에 참여하면서 공을 세웠다. 상해임시정부
소속으로 된 이후 군정부軍政府는 1919년 11월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62) 成昌鎬, 『海東人物誌』 坤(대전: 回想社, 1969년), 295쪽.
63) 李裕岦. 『대배달민족사』 1권(서울: 고려가, 1987), 383쪽. 자세한 사항은 윤창열, 「운초 계연수의 생애, 사상 및
업적」(2020년 세계환단학회 춘계학술자료집) 9쪽 참조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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