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6 - 국제학술문화제-천부경/국제 분과
P. 176
천부경 분과
四七五二年 三月十六日創刊號가 발간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 檀紀四七五二年은 서기 2419년으
로 오기임이 분명하다. 『대배달민족사』 5권에는 “檀紀四二五二年 三月十六日, 創刊號가 간행되어”
라고 기록되어 檀紀四七五二年의 오기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단학회보》의 창간 시기는
‘단학회’의 만주 홍석납자로 이전하는 문제와 관련 있다. 1919년 창간설을 따르게 되면 ‘단학회’
는 1918년 겨울에 홍석납자로 이전을 하고 배달의숙을 세우고 이듬해인 1919년 3월 16일에 《단
학회보》를 창간하였다. 45) 이러한 주장은 《커발한》 14호와 47호에 실린 기록에 근거한다.
隆熙八年 甲寅 三月十六日 평안북도 天摩山 聖人堂에 모여 三神의 主壁下에 三祖의 신위를 모
시고 제사를 올리면서 檀學會의 기본대책을 토의하고 본부를 남만주 寬甸縣紅石拉子에 두기로
하는한편 檀學會報를 발간하기로 하여 第八號까지 배본되었던 것이다. (중략)
그때 天摩山 확대회의에 참석한 중요간부는 雲樵桂延壽, 檀海李觀楫, 石泉崔時興, 松庵吳東
振, 白下金孝雲, 碧山李德秀, 一峰朴應伯, 昌春梁承雨, 直松李龍潭, 菊隱李泰楫, 綠水徐靑山,
白舟白亨奎 등 十二명이 이었으며 戊午七月에 白岩洪範圖將軍과 石洲李相龍先生은 碧山의
소개로 참가하였으며 그해 十月 開天節에 朴應龍, 鄭昌和, 朴龍琰, 金柄周, 李龍俊, 李奉 , 許
基浩, 申讚禎, 李陽甫, 朱尚玉, 李東奎, 金錫奎, 孫榮麟, 李振武 등 十四名이 추가로 趣旨文에
서명하게되어 그때의 회원이 총 五萬여명에 달하였던것이니 (중략) 檀學會報는 檀紀四七五二
年 三月十六日創刊號가 발간되어 第八號까지에 끊첬으나 46)
五八一六, 己未 三月十六日
檀學會報創刊, 石洲大宗師께서 朝鮮人의 十寶章을 宣布하시다. 47)
《커발한》 14호의 내용은 『대배달민족사』 5권에 「아직 표상없는 雲樵 桂延壽」라는 글에 실려 있
다. 48)
光武十八年(甲寅)에 이르러 雲樵桂延壽·檀海李觀楫·石泉崔時興·松庵吳東振·白下金孝雲·
碧山李德秀·一峰朴應伯·昌春梁承雨·直松李龍潭·菊隱李泰楫·綠水徐靑山·白舟白亨奎 등 十
二仙人의 굳은 祭天血盟을 맺고 民族主義 敎學과 史觀을 正立하므로 抗日獨立統一陣線을 확
대하는데 힘쓰기로 하였다. 그 이듬해 白岩洪範圖將軍·石洲李相龍先生의 동조를 얻고 그해 十
45) 단학회의 1918년 이전과 《단학회보》의 1919년 창간설을 따르는 것으로는 박성수의 「『환단고기』 탄생의 역사」,
윤창열의 「운초 계연수의 생애 사상 및 업적」, 장신의 「이유립의 계연수 날조기(捏造記)」 등이 있다.
46) 「檀學會略史」, 《커발한》 14호(대전: 단단학회, 1968년 9월), 4~5면.
‘李奉 ’는 『대배달민족사』 5권 「아직 표상없는 雲樵 桂延壽」에서는 ‘李奉璃’로 되어 있다.
47) 「檀學會略史」, 《커발한》 47호(대전: 단단학회, 1975년 5월), 7면.
48) 1970년대 후반 월간 《자유》에 실렸던 단단학회 관련 글들을 모아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 天卷,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 仁卷으로 1983년에 출간되었다. 이후 1987년 『대배달민족사』 출간될 때 4권과 5권으로 포함되었다.
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