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9 - 국제학술문화제-천부경/국제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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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연수의 『천부경』 이해 김철수, 전재우
기서」에는 『천부경』을 처음 발견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스승인 이기李沂 25) (1848~1909)가 가르
쳐준 『천부경』의 원본, 즉 아직까지 전하는 곳이 남아 있는 최치원의 고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천부는 바로 가르침을 베푼 경전으로서 아직까지 전해 내려오는 곳이 남아 있으니 … 제가 이
를 마음속에 새겨 두고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였습니다. …
약초 캐는 것을 업으로 삼아 구름과 같이 명산에서 노닐기를 10년 쯤 하다가 지난 가을에 태백
산(묘향산)에 들어가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수원水源까지 걸어서 인적이 없는 곳에 이르렀더니,
시냇가 석벽에 옛 각자刻字가 있는 듯해서 손으로 이끼를 쓸어내고 보니 글자의 필획이 분명한
데 과연 천부신경이었습니다.(而天符난 卽設敎之經也라 尙今遺傳處하니 … 僕이 銘在心中하
고 求之不得矣러니 … 採藥爲業하야 雲遊名山十許年矣라가 昨秋에 入太白山하야 信步窮源에
行到人跡不到之處하니 澗上石壁에 若有古刻이라 手掃苔蘚하니 字劃分明에 果是天符神經이
라) 26)
또한 지금까지 대부분은 단군교에서 발표한 「계연수기서」 위주로만 연구하여왔다. 그러나 ‘단
단학회’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은 《커발한》 창간호에서 다른 주장을 하였다.
檀紀 四二五○年에 와서 雲樵居士 桂延壽와 菊隱 李泰楫 두 분이 寧邊 妙香山에 들어가 靈藥을
캐러 다니다가 偶然히 深壑絶壁에 留刻되어 있는 것을 發見하고 이 天符經 八十一字를 各其寫
出하여 雲樵는 檀君敎 本部로 보내고 菊隱은 檀學會로 보내어 비로소 世上에 다시 傳播되었다
는 것이다. 27)
이석영의 주장은 「계연수기서」에서 알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계연수가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 81자를 취했을 때 함께 동행한 사람이 이태집李太楫 28) (1871~1928)
하지 않고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계연수기서」를 논할 때는 계연수가 묘향산에서 『천부경』 81字를 발견했다
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이유립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유립은 계연수가 1899년에 『천부경요해』를 간행하였으며,
1911년에는 『환단고기』를 발간하였다고 하는 주장을 인용하며 1917년에 묘향산에서 처음 『천부경』을 발견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 주장한다. 또 『천부경요해』 라는 주석서를 출간한 사람이 『천부경』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모순이라
주장한다.
25) 이기는 1897년 광무원년에 계연수를 제자로 삼았으며, 집안에 간직한 이맥의 『태백일사』와 이암의 『태백진훈』을
전수해 주었다. 또한 『태백진훈』에 주석을 단 『태백속경』 지어 계연수에게 전수했다. 이기의 저서로는 1955년 국사편
찬위원회에서 간행한 『海鶴遺書』가 있다고 알려졌다. 박종혁은 박사학위논문인 「海鶴 李沂 硏究 : 韓末 激變期에 對應한
思想과 文學」을 통해 『海鶴遺書』의 원저인 『海鶴遺稿』가 있음을 밝혔다. 특히 『海鶴遺稿』에는 「增註眞敎太白經」이라는
『태백속경』의 원저에 해당하는 글이 있다.
26) 「桂延壽寄書」 中에서 발췌, 《檀鐸》창간호(1921. 11. 28.)
27) 이석영, 「천부경에 대한 나의 관견」, 《커발한》창간호(대전: 단단학회, 1965년 4월), 8면.
28) 이유립의 숙부이다.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집과 함께 계연수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태집의 아들인 이유항李裕沆은
‘천부경찬天符經贊’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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