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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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문: 우리 정신의 철학적 복원 이승종
그런데 과연 샤머니즘에 경전이 있는가? 샤먼은 주술사이지 공자나 부처와 같이 담론을 펼치거
나 맹자나 플라톤과 같이 글을 남긴 사상가가 아니다. 다른 문화권에서도 샤머니즘의 경전은 없으
며 샤머니즘에 대한 우리의 문헌을 살펴보아도 경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앞서 살펴본 우리의 선가
경전도 샤머니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을 남기고 기록한다는 행위 자체가 신령의 직접
체험과 직접적 교류를 추구하는 샤머니즘과 위배된다. 샤머니즘은 경전보다 더 오랜 정신이므로
문자 시대의 개념적 경전을 갈망할수록 문자와 경전 이전의 샤머니즘 정신은 더 보이지 않게 된
다. 28)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없는 경전을 없다고 안타까워하거나 경전 이전의 샤머니즘을
원시적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방기하기보다는, 우리 샤머니즘 정신의 의미와 가치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현재에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하나의 좋은 출발점은 삼국유사 에 수록된
단군사화일 것이다.
단군사화는 역사와는 무관한 신화일 뿐이며 그것이 실려 있는 삼국유사 가 편찬된 13세기에
만들어진 신화라는 편견이 있다. 29) 삼국유사 에서 일연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북제의 위수가
편찬한 고본(古本) 위서 와, 서지사항을 알 수 없는 고기 를 인용해 단군사화를 전개한다. 북제
는 550년부터 577년까지 있었던 국가이고 위수는 506년부터 572년까지 생존했던 역사가이므로
고본 위서 는 550년부터 572년 사이에 편찬되었음이 추론되는데,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저 때가 삼국유사 를 기준으로 하자면 단군사화에 대한 기록의 상한선이 된다.
비록 단군은 위수가 고본 위서 를 편찬하던 시대로부터도 한참 전의 인물이지만 삼국유사 에
의하면 고조선은 1908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존속했고 30) 그 뒤를 이어 삼국시대가 펼쳐졌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위서 의 기록은 상당한 신빙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이 건국한 고조선의 존
속 기간 동안은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단군사화가 간직되었을 것이고, 적어도 그 뒤를 이은 삼국시
“선(仙)”의 옛글자인 “선(僊)”도 춤을 의미한다. 저 용어들의 의미론적 연관성을 짚어볼 때 여기서의 춤은 접신된 샤먼의
춤에 연원함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능화는 샤먼(무당)을 일컬어 “춤으로 신을 내리게 하고 노래로 신을 즐겁게” 하는
자로 정의한다. “춤과 노래가 무격(巫覡)의 기원”이라는 것이다(이능화 1927, 72-73쪽).
* 고려사 에는 국가에서 무당을 소집한 기사가 자주 보인다. 그 한 예로 인종 11년인 1133년에 무녀 300명을 소집해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는 기사가 있다.
28) 그렇다고 우리의 샤머니즘에 대한 아무런 기록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치원은 “나라의 현묘한 도를 풍류라 하는
데 그 교를 창설한 내력이 선사(仙史)에 실려 있다”고 말한다. 실전(失傳)된 까닭에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제목으로
보건대 선사는 경전이 아니라 도맥(道脈)을 서술한 사서(史書)였을 것이다.
29) 한국의 동양철학계와 서양철학계를 각각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김충렬 교수와 소광희 교수도 단군신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거부감을 표하고 있다(김충렬 1977; 소광희 1977). 김충렬 교수는 심지어 단군신화를 철학사상의 원천
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대해 “사학자들의 양심있는 비판이 있어야 할 것”(김충렬 1977, 49쪽)이라면서 사학을 잣대로
철학을 재단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저 두 고명한 철학자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학계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의 초기 기록을 역사적 기록이 아닌 김부식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는 불신론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다음을 참조. 이승종 2021b, 1부.
30) 一然, 三國遺事 , 「紀異」, <古朝鮮條>, 壇君王儉 以唐高(堯)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
達 […] 御國一千五百年 周虎(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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