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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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 분과
성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곤 한다. 조선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유교이성비판이 우리 스스로에 의해 한 번도 수행된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유교적 관성
의 유혹에 여전히 무방비상태이고 실제로 그 덫에 쉽게 걸려들곤 한다. 이는 우리 시대에 자유시장
경제가 삐걱거릴 때마다 뜬금없이 시대착오적 사회주의가 재 호출되곤 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이
다.
조선이 낳은 걸출한 철학자인 정약용의 비판은 유교 자체가 아니라 주자학에 대한 것이었기에
유교이성비판으로 보기는 어렵다. 성리학의 이데올로기가 서슬 퍼렇게 지배하던 조선에서 주자학
에 반기를 든 것만 해도 위험하고 파격적인 행보였지만, 그러한 정약용도 공맹(公孟)을 비판하거나
넘어설 엄두는 내지 못했다(이승종 2018, 4편 참조).
유교의 성리학적 화석화는 유교의 시조인 공자에게서 이미 그 전조를 찾을 수 있다. 논어 의
「향당」편에서 보이는 격식주의, 이(夷)의 은나라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선대의 전통을 괴력
난신(怪力亂神)으로 폄하하고 주나라의 문물만을 숭상하는 이성중심주의 혹은 인간중심주의, 세
상만사를 도덕의 잣대로 평가하고 이해하는 도덕주의 등은 소중화를 추구한 조선 성리학에 그대
로 수혈되었다. 「향당」의 격식주의는 예송논쟁을 낳았고, 숭상의 대상은 주나라에서 명나라로 업
데이트되었으며, 도덕주의는 도덕형이상학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유교 이데올로기로 단일화된
사회 체계 하에서 소격서로 대표되는 하늘과 별에 대한 제사는 폐지되고 팔관회로 대표되는 전통
1)
적 축제 문화도 금지되었다. 중화사관과 어긋나 보이는 사서(史書)들은 모두 수거되고, 관변 이데
올로기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나 선비들은 사화를 면치 못했다. 조선은 철두철미 유교의 나라
2)
였으며 유교는 조선 지배계층의 생활양식이었다.
조선에서 유교는 사대주의와 짝을 이루어왔다. 유교를 배우고 익힌다는 것이 중국의 문물을 배
우고 익힌다는 것과 동의어로 간주되다보니 중국을 종주국으로 삼고 조선을 제후국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했다. 유교를 배우고 익히면서 조선인은 이(夷)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 부과한 이
3)
등 중국인의 자격으로(소중화) 중국적 천하질서에 귀화되었다.
4)
1)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으로 자처하면서 중국의 천자만이 하늘을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천 년을 이어온 제천례를
폐지한 것이다(김일권 2008b, 361쪽).
2) 유가의 학문인 주자학을 수입해 연찬한 정몽주는 “꿈속에서라도 주(周)나라를 본다”는 뜻에서 이름을 몽주(夢周)라
지었다. 그의 꿈은 한반도가 중국 고대의 이상 국가인 주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조선을 개국한 정도전의 이름은 도(道)
를 전한다(傳)는 뜻이다. 여기서 도란 ‘주자의 도’를 의미하는데 그의 꿈은 조선을 주자학의 나라로 만드는 것이었다.
3) 조선은 1876년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 1조에서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고도 사대질서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각종 외교문서에서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이며 번봉(藩封)임을 당연시 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1882년 청
나라와 체결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이 그 한 예이다. 명나라 황제들을 제사지내는 충북 괴산
의 만동묘는 명나라가 멸망한 뒤 60여년이 지난 1704년에 송시열의 유지로 건립되어 국가로부터 융숭한 대우를 받아
오다 1907년에 일제에 의해 철폐되었지만, 제사는 지방 유림들에 의해 1937년까지 비밀리에 지속되다가 일제에 발각
되고 나서야 멈추게 된다.
4) 심지어 산수화조차 중국적 도상, 중국 고사에 나오는 인물, 장소, 실제 중국 명승지 등을 상상해서 그렸다. 숱하게
남아있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소상팔경은 현재 중국 호남성의 동정호로 흘러드는 소수
(瀟水)와 상강(湘江)의 경치를 말한다. 진경산수화의 거장인 정선조차 평생토록 소상팔경도를 그렸다. 가보지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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