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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수운 최제우의 생애와 사상  김삼웅



                 가치관이 아닐까 싶다.



                                    동학혁명 성공했다면 아시아 선진주도




                   최제우의 사상이 일차적으로 현실화된 1894년의 동학 농민혁명은 비록 현대 병기로 무장한 일

                 본군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으나, 동학정신은 우리의 개화사상과 민주화운동의 본류로 서 면면히
                 이어졌다.

                   동학혁명 후에 전개된 고종의 갑오경장은 그것이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에 의해 「내정개혁
                 방안 강령 5개조」에 따라 진행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사회면의 개혁 즉 문벌과 양반 상놈의 계급제

                 타파, 능력에 의한 인재등용, 공사노비법 폐지, 과부의 재가허용, 고문과 연좌법 폐지, 조혼금지
                 등은 동학혁명의 ‘폐정개혁안’이고, 최제우의 후천개벽사상에서 기원한다.
                   혹자는 동학꾼들이 난을 일으켜서 일본군이 들어오게 되고, 결국 망국에 이르렀다고 개탄한다.

                 말기 증세에서 허덕거리는 왕조(고종)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정당한 궐기를 외국군을 불

                 러들여 진압(학살)하고, 그 군대를 잔류시키게 만든 것은 우둔한 임금과 우매한 척신 관료들이었
                 다.
                   동학군은 호남의 요충지인 전주성을 점령했다가 일본군이 내침하자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폐정개혁안 12개조를 타협한 후 전라도 53개 군현에 농민자치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

                 혁에 착수하였다. ‘외적’의 침략을 받고 ‘내적’ 타도의 진군을 멈춘 것이다.
                   고종이나 조정 각료대신들은 그때까지도 일본이 청국과 텐진조약을 통해 ‘상호출병’을 밀조한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이 ‘카츠라 - 테프트밀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 미국은

                 필리핀을 나눠먹기로 밀약한 것을 모르고 있었던 일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고종을 두고 학계 일각

                 에서는 ‘개명군주’라고 추켜세우는 등 얼이 없는 학자들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세가와 지식인ㆍ종교인ㆍ언론인 중에는 외세에 빌붙어 종살이를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기득권을 놓치지않고 지배층이 되겠노라는, 사대주의에 찌든 부류가 적지않고 이들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을 이루고 있다.

                   안타깝고 아쉬운 점은 만약 동학혁명이 성공했으면, 한민족의 능력으로 보아 충분히 아시아의
                 근대화를 주도하고 평화스러운 동북아시대를 열었으리라는 사실이다.



                                      동학의 좌절로 사대세력 다시 기승




                   일찍이 단재 신채호는 중국 망명지에서 「조선역사상 1천년 래 제1대사건」이란 명문을 쓴 바 있
                 다. 고려 인종 13년(1135년)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 일파가 김부식 세력에게 패한 사실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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