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P. 30

정신문화 분과


                 장 큰 그 원인으로 지적하였다. 신채호의 진단을 들어보자.



                    서경전역은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전역이 곧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

                    수사상의 싸움이다.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ㆍ보수적ㆍ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
                    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ㆍ진취적

                    방향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천년에 제1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역사에서 비록 가정이 부질없다지만, 최제우의 개혁이 수용되었더라면, 동학혁명이 성공하여
                 ‘사회질병’을 수술하고 ‘후천개벽’의 길로 나아갔으면, 일본이 1868년 단행한 메이지유신에 앞서

                 조선은 근대화의 길을 열었을 것이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랬으면 분단이
                 나 6ㆍ25 동족상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인물 중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필두로 하는 자들은 조
                 선을 정벌하자는 이른바 정한론자들이었지만, 최제우나 동학혁명 주도자들은 하나 같이 생명사상

                 과 평화론자들이었다. 두 나라 사상가들의 결과 격이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더욱 동학의
                 좌초는 우리를 가슴 저리게 한다.



                                   최시형ㆍ손병희로 이어진 민족사의 정맥




                   최제우의 순교 이후 혹독한 관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사상의 정맥은 후계자 최시형에게
                 전수되었다. 최제우와 최시형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넘어서는 사이였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중국에서 “유교의 전제에 맞선 중국사상사 최대의 이단자”로 불리는 이탁오(李卓吾)는 “벗할 수 없

                 다면 참다운 스승이 아니고, 스승으로 삼을 수 없다면 좋은 벗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최제우와 최시형이 그런 관계였다. 사제간이면서 벗이 될 만큼 최시형은 스승을 존중하였고 스
                 승은 각별히 제자를 아꼈다. 최제우는 대구감영에서 순교에 앞서 제자의 피신을 당부할만큼 깊게

                 배려하였다. 최시형이 목에 현상금이 붙고 쫓기는 처지에서도 동학경전을 간행하고 포교활동을

                 멈추지 않은 배경이다.
                   최시형은 “하늘을 섬기듯 사람을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내걸고, 30여 년 동안 보따리
                 하나로 전국 200여 곳을 떠돌며, 동학도들에게 개인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변혁을 향아설위(向我

                 設位)로, 집단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번혁을 후천개벽이라 가르치면서 동학을 전국 단위로 확산시



                 30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