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1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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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난랑비서」의 風流에 대한 고찰 이주희
각 교파의 종지(宗旨)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인간 삶에 있어서 훌륭한 지침이 되는 건 사실이
지만, 부분적인 가르침을 진리의 온전한 모습인양 받아들이는데서 타종교를 배척하고 편협한 문
화로 흐르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그렇기에 삼교를 이미 그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풍류야말로
균형되고 조화로운 진리의 온전한 양태를 드러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고 하겠다.
실로 이 땅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되기 전 유불선의 원형적 형태가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인 「지증대사비명(智證大師碑銘)」이다. 「사산비명」이란 '
네 군데 산(山)에 남긴 비석의 글'이라는 뜻인데 신라 말 최치원이 남긴 네 곳의 비명(碑銘)을 말한
다. 「지증대사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鷄林地在鰲山側 계림의 땅은 오산 곁에 있는데
仙儒自古多奇特 예로부터 仙과 儒에 기특함이 많았네. 36)
최치원이 몸담았던 신라에 예로부터 선과 유의 사상적 맥이 전해져왔고, 기이하고 특이함이 많
았다는 것으로 보아 한국 고유의 선과 유의 특이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 「가섭불연
좌석」조에서 신라에 전불(前佛)터가 존재함을 많은 이들이 말하고 있다.
『옥룡집』과 『자장전』, 그리고 여러 사람의 전기에는 모두 이렇게 말했다. “신라 월성 동쪽, 용궁
남쪽에 가섭불의 연좌석이 있으니, 이곳은 곧 전 세상 부처 때의 절터로, 지금의 황룡사 터는 곧
일곱 절 가운데 하나이다.” 37)
가섭불은 과거 칠불(七佛) 38) 중의 하나로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이다. 연좌석(宴坐石)은 좌선하
던 돌을 말하는데, 석가모니 이전 부처인 가섭불이 좌선하던 절터가 신라에 존재함은 이미 전불시
대(前佛時代)부터 부처가 되는 도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실내포함삼교’하는 풍류의 자취를 접할 때, 삼교를 균형있게 유기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는 것인데 이것은 풍류가 ‘종합적’이라는 걸 뜻한다. 필자는 풍류가 종합적인 문화가 될 수 있는
이유로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역설의 논리가 발달해 있는 것이고 두 번째
는 수(數)의 원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모든 사물의 존재양상은 양극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이 양극단이 투쟁 상태에
놓이거나, 한 쪽을 선택하여 일방향으로 흐르는 편파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 모순을 극복
36) 아세아문화사 편, 『역주 최치원전집』 1, 아세아문화사, 1998, 286쪽을 최영성, 「崔致遠의 玄妙之道와 儒·仙思想」,
『한국고대사탐구』 Vol.9,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1, 91쪽에서 재인용.
37) 일연, 『삼국유사』권3, 「탑상」제4, 가섭불연좌석, 玉龍集及慈藏傳, 與諸家傳紀皆云. “新羅月城東龍宫南有迦葉佛宴
坐石, 其地即前佛時伽藍之墟也, 今皇龍寺之地即七伽藍之一也.”
38) 칠불은 비파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 석가모니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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